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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의 기원

페이지터너(Page Turner)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1. 26.

페이지터너(Page Turner)

 

무대 위의 유령이라고도 불리우는 페이지터너(Page Turner)는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말한다. 피아니스트 옆 보조 의자에 앉아 있는 페이지터너는 존재감이 없어야 비로소 존재의미가 드러난다. 대개 마른 체형이었고 젊은 여성이었고 긴 생머리를 뒤로 묶었으며 대개 검은 색 일습의 옷차림이었다. 표정은 없었다. 그것은 페이지터너가 갖추어야 할 기본 사항인지도 모른다.

음악회에 가서 종종 나는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피아니스트보다 그림자처럼 앉아있는 페이지터너를 주시하곤 했다. 고요히 앉아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악보를 눈으로 좇아가면서 어느 정도에 이르러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넘길 페이지의 한끝을 아주 조금 들어올린다.

나는 페이지터너의 손끝에 넘겨질 페이지와 악보 사이의, 짧지만 깊은 어둠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옷차림의 페이지터너가 악보를 가리지 않도록 악보의 위쪽으로 한껏 길게 팔을 뻗어 침착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프로 의식일 것이다.

나에게는, 피아니스트 옆에서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악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페이지터너 역시 연주자로 비춰졌다. 화려한 의상의 피아니스트와는 대조적으로 존재했던, 마치 한편의 판토마임을 보는 듯 나는 페이지터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고 그 시간이 나는 좋았다. 무언극의 비중으로 다가왔던 페이지터너의 작은 동작들.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지난 토요일 모임이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지만 넓은 통창으로 금색 실뭉치 같은 햇볕이 쏟아지는 작은 거실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따사로웠다. 빠리에서 십 수 년 간 유학했던 선배는 그 집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놀라움과 기쁨에 섞인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았다어쩌면!  공간이동을 해서 내가 마치 빠리에 있는 느낌이야

신을 벗지 않고 생활하도록 만들어진 서구식 스타일의 실내는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의 집 답게 모던했다. 검은 색 페인트를 칠한 작은 방, 골조가 드러나 있는 구석의 부엌과 방 한 가운데 커다란 책상이 놓인 큰 방을 쳉키라는 이름의 크고 검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엔디워홀 옆에 루벤스가 있는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팔걸이가 있는 검은 벨벳의 엔틱 의자에 머리에 터번을 두른 배우가 앉으니 너무 완벽하게 어울려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거의 화장을 하지 않은 배우는 적당한 자긍심과 적당한 따스함이 적당히 배어있는 미소로 우리의 찬사를 받았다.

빠리지엔느 같은 일흔 살 어귀의 여인에게는 아멜리아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이미지는 신비한 것이어서 소녀에 가까운 젊은 여주인공 아멜리아와 여인의 이미지는 기가 막히도록 맞아떨어졌다. 모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프랑스 영화 아멜리아에서 주인공 아멜리아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여인에게 말해주었는데 함박꽃 같았던 그녀의 웃음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삼십 여분의 간격을 두고 몇 사람이 더 집안으로 들어섰다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온 그들은 자연스럽게 현관에서 코트와 모자를 벗었고 젊은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패브릭 소파나 딱딱한 이케아 의자, 앉으면 푹 가라앉는 스툴이나 실용적인 스타일의 의자 등에 앉았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주먹을 쥐고 쳉키 얼굴 가까이 갖다 대면 누구라도 쳉키는 이마를 주먹에 들이대어 인사했다. 검은 고양이의 인사법이 재미있고 귀여워 모두 주먹을 꼭 쥐고 쳉키, 쳉키, 하며 쳉키를 불렀다. 밝은 음색의 재즈가 흐르는 가운데,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은 안부를 확인하고 미소를 나누었다. 벽 한 면을 온통 목재로 칸칸이 짜 넣은 선반에는 주로 책이, 그 사이로 작은 조각품과 디스크와 오래된 장식품 가운데는 로이 릭턴스타인의 '행복한 눈물'과 비슷한 그림도 눈에 띄었다. 나에게는 만화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두 시간 넘게 우리는 이야기했다어느 노작가의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은 모인 모든 사람에게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라운 경험'을 추체험하게 만들었다. 삶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노작가는 산길 정상 어귀 쉼터에 앉아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나는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때는 진한 꽃다발처럼 향기를 맡을 수도 있었다. 정말 그랬다. 진정성이 담긴 깊은 대화는 아름다웠고 나는 그 황홀에 푹 잠겼다. 내가 원하는 만남의 모습이 완벽하게 그 모임 속에 구현된 것이 기뻤고나의 신에게 아울러 감사를 드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페이지터너가 자꾸 떠올랐다작가들과 배우들과 그 밖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삶의 순간에 맞닥뜨린 운명적인 조우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신비스러운 감동에 젖어들고 있었다. 베일에 싸였던 비밀이 와락 내안에서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 비밀의 키워드가 바로 페이지터너였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 공간을 허락해주는 것. 그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 이제껏 나의 삶이라고 우겼던, 그래서 실은 더욱 고통스러웠던 주인의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쳉키에게 꼭 쥔 주먹을 내밀고 싶었다. 쳉키가 어슬렁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내 주먹에 이마를 부딪치며 인사할 수 있도록.

 

그날 나는 나의 생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을 알았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하나님이 잘 연주할 수 있도록 조용히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드디어 하나님을 앉혀드린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연주에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믿을 수 없지만 진심이다.

결국 쳉키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자리에 일어서면서 쳉키를 찾았지만 알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 수많은 만남이 있다. 누군가와는 악수를 하고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눈다. 누군가와는 그냥 스쳐 지날지도 모르고 누군가와는 오해와 질시로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깊게 허그하고 싶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편지를 건네주고 싶기도 하겠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모두 귀한 피아니스트이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주인공 자리를 내어 주고, 기꺼이 보조의자에 앉아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그들의 악보를 넘겨줄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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