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 전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중의 괴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했던 바울.
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바울과 디모데는 믿음의 동역자이지 않았을까. 사람은 친구나 이웃을 누구를 만나는 가에 따라 삶의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 면으로 보아 신앙에 관한 문제와 의문과 경험과 은혜를 전폭적으로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친구도 있고, 교회에서도 교우들과의 교분을 나눌 수 있지만 나의 삶속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순간순간 내가 만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뜻에 대하여 묵상한 말씀에 대하여, 혹은 기도 중 느낌에 대하여, 아니면 믿음의 실제상황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하여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쉽게 고를 수 없다.
나에게는 금보다 더 귀한 그런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 십 몇 년을 함께 교제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하여 중보기도 하는 귀한 동역자이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더욱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느낀다.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배우고 느끼고 은혜 받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두 교회의 좋은 점을 포괄할 수 있으니 은혜가 두 배로 커진다. 대화 중에 해결점이 보이기도 하고, 각자 받은 은혜를 나누어 배가 되는 경험을 수 없이 많이 하고 있다. 남편에게도 말하기 힘들고, 자식에게는 하물며 입을 열기 어렵고, 목사님에게도 상의 할 수 없는(그런데 궁금하다. 요즘에도 목사님과 상담하는 분이 계실까? 성경 구절에 대하여, 나의 삶속에 얽혀있는 고민에 대하여, 교회 전반의 의아한 점이나 개선점에 대하여 진솔하게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에 대해 성심성의껏 답해줄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는 목사님이 계실까? 대한민국의 목사님은 정말 너무도 바쁘다. 내가 보기에는 매우 영양가 없이 바쁘신 것 같다) 그런 내용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 믿음의 동역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소연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결점을 찾으려 하고 기어이 찾게 된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믿음의 동역자가 가르쳐 준 것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나에게 김진홍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고 십 년 동안 김진홍 목사님의 테이프를 듣게 하고, 원종수 장로를 소개시켜 주고 비디오와 테이프를 들으면서 은혜 받게 해주고, 이재철 목사님을 가르쳐주고 그의 수많은 책과 말씀을 전해 듣게 만들어주었다. 뿐인가 김동호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고 그 목사님의 말씀과 책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루이스를 알게 해주고, 비교종교학 책들과 스님들의 이야기를 엮은 많은 책을 소개시켜 주었다.
삼십 몇 년 동안 한 교회에서 거의 한 목사님의 설교만 듣고 살아온 나에게 폭 넓은 신앙의 지식을 알려준 믿음의 동역자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의 동역자 역시 나를 만나고 난 후, 집에 가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존중하고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의 신앙을 존중한다. 각자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손길을 같이 체험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 엊그제 멋진 성경쓰기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 되어 믿음의 동역자에게 알려 주었더니 즉시 등록하여 매일 성경을 같이 쓰고 있다. 이른 아침 성경을 쓰고 난 후 클릭해보면 나의 믿음의 동역자가 몇 시에 성경 몇 장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나의 믿음의 동역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교제는 서로를 살찌우게 하고 깨닫게 하고 광활한 우주 너머를 통찰하시는 넓은 하나님을 맛보게 해준다.
16절. 그러나 내가 궁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이 된다는 말씀. 바울은 당당하게 나를 본받으라, 고 말했다. 나는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로마서 8장 39절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아들아, 신앙은 나를 본받아라. 그래서 내가 누리는 기쁨을 너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게으름과 고집과 변덕스러움과 이기주의 같은 것은 절대 본받으면 안 되겠지만(그런데 이미 많이 본받고 있는 것 같구나, 아들아. ㅠ. ㅠ )하나님 믿는 것은 나를 본받아라. 이것은 유언이다.
2장의 말씀은 대단히 구식이다. 12절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기분 나빠서 밑줄 치고 싶지 않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이런 여성비하 발언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바울은 역시(예수가 아니므로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어느 면에서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다. 하긴 바울이 밀레니엄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나는 바울을 매우 좋아하지만 이런 구절이 나오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아무리 바울이라도 당시대의 풍습이나 관념은 벗어나기 힘든 모양이다.
바울이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 구절 뒤에다 <이 말은 세월이 가면 바뀔 수도 있음>이라고 써놓았어야 한다. 하긴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성경에 편입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사사로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몇 장이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리라고 어떻게 바울이 알 수 있겠느냐고요.
문제는!
이런 구절을 현대 대한민국 교회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노친네 장로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아직도 무수히 많이 계시고 (좀 앓아눕기라고 하셔서 그런 주장을 안 하셨으면 좋으련만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아직도 건장하시다. 그렇지 않으면 참 좋겠지만 교회 안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은 꽤 있다. 그것은 각 사람과의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곳에 합의를 이끌어 낼 정도로 기나긴 토론을 할 기력이 나에게는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분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하지만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지신 분들 강건하시와요.
그렇게 남자들을 싸고 돌려면 교회에서 시키는 수많은 일들의 거의 대부분은 여자가 해야하는데 이제부터라도 그냥 종용히 있을까요. 종용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여자 인도자는 왜 시키는 것인가요! (매우 흥분한 상태로 약 오분 동안 씩씩거림)
- 5분 경과 후.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흥분할 일은 아닌 거 같다. 당시 바울의 생각이 그러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 내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들 죽은 바울이 다시 살아나 편지 구절을 고칠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편하게 바울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그렇게 안 산다, 어쩔래. 하면서 가슴으로 뻗대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천국에서 바울이 뭐라고 하면 예수님 뒤로 가서 숨어 버리면 된다. 마리아도 이뻐하고 마르다도 이뻐하고 하다못해 간음한 여자도 다독거려주는 예수님이 내 편을 안 들어주실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4:6~7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 Godly. 지난여름, 경건의 영어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God의 뒤에 부사형 조사 ly를 붙인 것이 바로 경건의 단어였던 것이다. 이후로 경건이라는 단어가 종종 생각났다. 하나님처럼 되어가는 것, 하나님 같아지는 것, 이라고 해석해도 좋을지 가방끈이 짧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보련다.
연습이라는 단어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연습 없이 실전에 나갈 수 없다. 몇 년 전 무슨 공부를 하는데 어느 교수님이 클래식을 들으라고 권하면서 클래식을 듣는데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듣기 힘들어도 자꾸 듣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귀가 뚫려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음악은 장르를 불문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유독 정이 안가는 장르가 있다. 요즘 한창 유행인 뉴 웨이브 음악이다. 그에 비하면 나훈아의 영영이 훨씬 더 낫다. 클래식은 들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안정되면서, 날카로운 감정을 잘 다스려주기 때문에 노트북 작업을 할 때 늘 틀어 놓는다. 개인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호흡이 긴 음악이 좋다. 일테면 28분짜리, 16분짜리 그런 거 말이다.
아참,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한 때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하기 위해서 한 달 꼬박 피아노 앞에 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연습에 몰두 한 적도 있을 만큼 좋아했다. 아주 오래 된 때,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가 전국을 강타하여 전 국민이 사랑받는 곡이 되어 몇 달 동안 어디를 가든 그 곡이 흘러나온 적이 있었다. 나 또한 충무로 지하상가를 지나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떠지는 충격적인 감동을 맛보았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쳐서 그 음악이 나오는 무슨 무슨 소리사(예전에는 그런 가게가 꽤 있었다)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넋 놓고 들었던 발라드!! 그 곡이 뉴 웨이브의 원조라면 실례! 그리고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도 뉴 웨이브라면 더더욱 실례!
이를 어쩐단 말인가. 나는 뉴웨이브가 어떤 장르인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서 또 헛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모르겠다. 좀 그렇지만 나의 주장을 번복해야 겠다. 뉴웨이브도 좋아합니다. (쑥스럽다)
결론을 빨리 내려야겠다. 무엇이든 연습이 필요합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긴 글을 읽기 힘들어하거나, 소설의 짜임새나 주제 등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소설책 읽는 것에 숙달되지 않으면 그 묘미를 느끼기 어렵다. 항간의 베스트셀러는 어느 면에서는 많은 읽는 연습이 없이도 통독할 수 있는 것들이고 그런 책들의 깊이 층은 얇은 수밖에 없다. 그럼 의미로 본다면 성경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의 일을 하는 것도, 그리고 참는 것도, 자신을 비우는 것도 모두 (세상의 일 거의가) 연습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롯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집에서 훈련하고 기르고 연습한 자 318명을 끌고 가서 롯을 구해온 적이 있었다. 그 어느 때(우리를 들어 쓰실 어느 순간 바로 하나님의 때)를 위하여 우리는 늘 준비하면서 연습해야할 의무를 느낀다.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2005년 하늘양식 8월 26일자에 일용할 양식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작년에도 그런 비슷한 말씀이 하늘양식에 있었는데 일용할 양식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의 말에 따르면(나는 루터의 말이 성경이 써 있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용할 양식에는 약간의 저금, 쾌적한 환경, 등등 우리가 일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나는 루터의 말에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성경에 위배된다고 본다. 지금 인터넷으로 루터의 말을 찾아냈다. 옮겨 적기 싫지만 옮겨놓는다.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의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음식, 음료수, 옷, 신발, 집, 마당, 들, 소, 돈, 소유, 헌신된 반려자, 자녀, 종업원, 신실한 통치자, 좋은 정부, 좋은 기후, 평화, 건강, 훈련, 존경,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말한다
-마틴 루터
디모데의 말과 마틴 루터의 말이 동일한가? 같은 의미인가?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하면서 가르쳐준 그 주기도문의 의미와 같은 의미인가?
내가 다시 한 번 옮겨 볼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모든 것을 주시옵고,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음식, 음료수, 옷, 신발, 집, 마당, 들, 소, 돈, 소유, 헌신된 반려자, 자녀, 종업원, 신실한 통치자, 좋은 정부, 좋은 기후, 평화, 건강, 훈련, 존경,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얼마나 욕심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나는 먹고 싶은 음식 잘 못 먹고, 음료수 잘 사먹지도 못하고, 옷은 더더구나 몇 벌 없고, 신발은 어딘가 잘 못 되어야 한 개 장만하며, 집값과 버금가는 빚을 지닌 하꼬방 같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며 물론 마당은 한 뼘도 없고, 들이나 소도 물론 없다. 돈? 빚으로 환산된 돈이 있다. 평생 저금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소유? 무슨 소유? 나에게 헌신하는 반려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리 감겨주고 옷 단추 잠가주고 용돈 주어야 할 반려자가 있다. 평균치 이하의 직장에서 고생하는 자녀와 종업원은 당연히 없으며, 국민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하는 통치자가 있으며,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좋지 않는 정부가 있고, 변덕스러운 기후가 사람들을 매우 괴롭히고 있고 평화롭지 않으며 매월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고 한 달 분 약을 타오는 상황이며 (훈련? 대체 뭘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미스터 루터씨? 존경? 일용할 양식에서 존경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해할 수 없고요) 좋은 친구 다행히 있고요, 그리고 좋은 이웃은 아직 사귀어보지 못했습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좋은 이웃이라고 말하기 곤란하거든요. 십 삼년 째 한 아파트에서 살지만 앞집과 교분이 전혀 없으니까요.
자, 루터 씨.
일용할 양식의 의미가 이렇게 중후하고 거대하고 끝간 데 없는 욕심덩어리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아 정말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을까요. 말도 안돼!! (비명을 지르는 나!!)나는 이제 당신의 말은 무시하겠습니다. 하긴 사람이 완전하지 않으니 당신도 마찬가지이겠지요. 편협한 당신의 사고방식에 약간의 동정을 보내드립니다, 미스터 루터씨. 다시는 나에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로 나를 시험 들게 하지 마세욧!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루터보다는 디모데가 한 수 위다. 아니 차원이 틀리다. 그러니까 루터의 말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겠지만.
며칠 전 TV를 보았다. 몽골 번화가에서 버스타고 12시간 가면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그곳에는 짐꾼들이 짐을 들어다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시간 걸리는 길을 50, 100킬로 200킬로나 되는 짐을 혼자 혹은 둘 셋이서 정말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린 대가로 받는 돈은 750원 1000원 2500원 정도였다. 거의 모슬림들이고 남자들끼리 10년 20년을 합숙하면서 살아간다. 허름하고 황당할 정도로 비좁은 방에서 담요 하나씩 두르고 모여 앉아있는 사내들의 눈빛이 참으로 인자해보였다. 선한 사람,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부인 자식들과 떨어져 사는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는 <우리는 참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티 없는 표정, 그리고 밝은 웃음은 선진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 천사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정말 부자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준행하는 자들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인들이다, 라고 나는 인정했다.
앞의 6절에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고 했는데 바로 그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비우고 살고 있는가.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는데 그 결론적인 말씀이 바로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있어야 할 것은 이미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일단 감사, 그다음에 지족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산다고 할진대 예수님은 얼마나 빈약한 삶을 살았는가? 타워 팰리스 바로 옆 비닐하우스 동네에서 살고 있는 예수님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딱, 어울렸다.
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디까지 내 삶에 적용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것은 다 빼고 좋은 것만 달라고 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본받으려고 하며, 과연 그 바람은 올바른 것일까?
정확한 사실은 아니지만 세계에서 제일 높은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최대빈국인 방글라데시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무엇이 그들을 행복하게 했을까. 우리는 그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어느 면에서는 북한도 비슷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들은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지 않는다. 절대적인 빈곤은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누구를 부러워할 이유도 없다. 어느 정도는 지족의 삶에 근접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슴 아픈 면은 많이 있지만 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말 동정할 사람들은 많이 소유해도 욕심이 끝이 없는 자와, 그리고 아프리카 오지의 <나의 힘으로 먹고 잘 능력이 없는, 그야말로 호구지책이 안 되는 불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믿음의 동역자가 말해준 <빡빡하게 베품>과 <흔들리게 베품>이 생각난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말해준 것이라는데 그것이 바로 분배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겐가 나누어주는 일은 나의 것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 정도에서 더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주면 나의 생활이 좀 휘청거릴 정도, 나누고 베풀면 나의 생활이 좀 흔들리는 정도로 베풀어라.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 두어야 할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되었다. 가끔 나의 뇌리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거 같다. 오늘은 큐티가 좀 이상하게 된 거 같지만 이만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다.
결론.
1. 믿음의 동역자와의 관계를 앞으로도 더욱 좋게 유지해야겠다.
2. 당당한 나의 믿음을 가지고 본을 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3. 경건의 연습과 더불어 내가 하기 힘들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연습하겠다.
4. 지족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