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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QT

디모데 후서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5.

디모데 후서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읽는다. 사사롭다.

1:12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날까지 지켜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1:15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부겔로 허모게내

오네스보로의 집에 자비를. 후메내오 빌레도 <- 진리에서 멀리 떠나버렸고.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4:16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디모데 후서에는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떠난 사람들, 아픈 사람, 남은 사람.

어쩐지 해질 무렵, 파장 분위기의 시장 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야망이나 꿈에 부풀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맥이 좀 빠지고 분위기는 매우 침잠해 있고 어깨가 약간 늘어지고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느낌.

문득 엊그제 설교 시간에 들은 말씀이 생각난다. <너도 가려느냐>, 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이었다. 따져보니 마음에 맞지 않아, 따라 다녀보니 별 볼일 없는 거 같아서 무리들이 뿔뿔이 제갈 길로 떠난다. 예수님이 묻는다. 너도 가려느냐? 그 때, 참으로 듬직한 답변이 나에게 감동을 준다. <영생의 말씀이 있사온데 어디로 가오리까.> 그것은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으려는 베드로의 의지를, 더 예수님을 꽉 붙들고 싶어 하는 베드로의 우직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럴 때는 정말 지식인의 믿음보다는 잘 모르더라도 순수한 베드로의 믿음이 한 수 위로 느껴진다.

말이 이상한 데로 가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아, 디모데 후서의 막바지 분위기가 좀 썰렁하여서 복음서의 비슷한 분위기 말씀이 기억난 것이었구나. 진도 나가자.

 

약간 열 받은 디모데는 입술에 힘을 주어 마지막 선언을 한다. 그러고 보니 3장 앞에 친절하게도 소제목이 붙어 있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 가르침>

사람은 마지막이라고 하면 더욱 마음이 당겨지고 귀를 모두어 듣게 된다. 그 마지막 가르침은 참으로 당당하고 멋지다.

 

 

3장 1절의 멋진 서두 “너는 이것을 알라!”

성경에 거론하는 ‘너’가 실제로 누구든 별 상관없다. 다만, 그 성경 구절을 읽는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아, 그 넓고도 광대하고도 포괄적인 가르침!

바울은 2000년 후의 한국 사회를 빤히 직시하며 말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세의 행태를 뽑아낸다. 과연, 바울이다.

사람들이, 라는 주어에 나를 집어넣고 겸손하게 읽어본다.

마지막 때에 3:2~~

(나는)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을 멀리 하십시오.

 

이런 구절을 읽을 때는 나는 아주 깊숙하고 음침하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고 싶어진다. 바울이 나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한 글자 한 글자 독을 품어내면서 썼단 말인가!

내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 버금가리만큼 돈을 사랑하며 늘 목을 곧게 하고 뽐내며 교만한지 어떻게 알았을까! 너무도 많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모독했으며 보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했으며(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뉘우친들 소용없는 그 불순종의 일생!),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웠으며 불경스러우며, 앞으로도 매우 불경스러울, 너무도 무정하며, 사무친 원한을 풀지 아니하는 나를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 심장에 가시를 꽂는단 말인가!

남을 비방할 때는 입에 침을 튀기며, 절제가 없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나의 난폭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면서 그것을 낙으로 알고 이제껏 살아왔으며, 사람들이 선이라 일컫는 것들에 대해 조소하며,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 때리며 살아온 것을 바울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이 무슨 미아리 족집게 무당같이 예언을 하신단 말인가, 바울은!

무모하기는 내 자신이 나에게 혀를 내두를 정도이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줄 내 자신과 하나님이 아시고 계시며, 겉으로는 매우 경건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경건함의 능력은 믿지 못하여서 지금 이 시각까지 의혹을 풀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알고 2000년 전에 디모데에서 편지를 써서 2000년 후의 한국의 쉰이 다 된 아줌마의 양심을 찔리게 만드는가 말이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겠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왕따가 되었구나!!

 

 

3: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소설가의 삶은 세 가지로 축약될 수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나의 직업과 기독교인의 삶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사용하는, 행하는) 기독교인의 삶, 그리고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작가의 삶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기독교인이 많이 생각하는 부분에는 기도와 묵상, 말씀 명상 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 또한 어릴 때부터 글자편집증에 걸릴 정도로 책을 좋아하고 책속에 파묻혀 무릉도원의 맛을 본 나에게 있어서 그다지 힘든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게 적용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운이 좋아 코드가 엇비슷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일단 그 한계를 교회 안으로만 한정시켜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교회 안에서의 경건 생활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배이다.

하지만 요즘의 예배는 부담스럽다. 어쩌다가 예배가 부담스러워졌을까.

엊그제의 실화를 공개하겠다.

핑계가 있으면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아들과 함께 모처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 그 날 우리 가족은 충분히 행복했다.

예배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광고시간에 사단이 났다. 몇 주 후면 있을 교회 행사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 번 교회에서는 새생명 축제라는 행사를 가졌다. 주위 분들 중에서 믿지 않거나 실족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3일 동안의 축제 집회였다. 이 집회를 위하여 교회 안팎에서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준비를 맡은 목사님은 눈에 띄게 핼쓱해지고 몸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런데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그 집회를 강력하게 홍보하는 중 옆 사람과 어머나! 하고 아주 놀란 표정으로 반가워하는 모습을 온 교인에게 시키는 것이었다. 자, 따라하세요! 어머나! 목사님도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단상에서) 계속 따라 하기를 강요하니까 모처럼 예배에 온 젊은 아들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정말 아들의 코드에 안 맞는 무리한 주문이기도 했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같이 오그라들었다.

그 광고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고가 예배의 감격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새 생명 축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만 예배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단언한다. 목사님은 광고시간에 나와서 온 교인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잔치이며 따라서 매우 자발적이어야 하고, ‘어머나’ 를 연습해서 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절로 어머나, 가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새 생명 축제로 인한 갖가지 전달 사항들이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하루에도 많게는 서너 번씩 날아들고 있다. 모두 연락하세요, 특별 기도회에 출석 여부 알려주세요, 안내 봉사 하세요, 준비 기도회 참석하세요, 속도 참석 여부 체크해 주세요 등등.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에서 오는 문자 메시지는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보증무담보 즉시 대출 안내와 오빠, 저 시간 많아요, 연락하삼, 이라는 스팸 문자와 거의 동급이 되어 가고 있는 교회 홍보 연락 문자 메시지를 어떻게 공해로 보지 않고 깜짝 놀라면서 어머나, 하면서 차근차근 읽어보고 기도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 그것을 나는 잘 모르겠다. 과도한 연락은 과유불급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교회라는 기관이 대기업처럼 체계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장에서처럼 속도, 속장, 구역장, 전도사, 목사 체계 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꿈꾼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이미 조직화 된 어떤 그룹이다. 상명하복, 같은 체재를 보면서 나는 그 속에 끼인 하나의 나사 못 같은 느낌이 들어 서글플 때가 종종 있다. 교회는 대기업이 아니다. 그렇게 체계적인 기획과 홍보와 조직위원회에서 빈틈없이 구상한 커리큘럼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성공적인 집회를 만들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보따리로 잘 싸서 삼성이나 현대에 가서 하면 어떨지.

 

문득 책 한 권이 떠오른다. 서둘러 책장을 뒤져 책 어느 부분을 옮겨본다.

책.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 (Is God For Sale?) 그레고리 루이스/이중수 역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우리들의 삶과 모범이 없이는 불신자들을 감화시킬 방법이 없다.

이 세상에게 정말 주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지금은 우리 교회의 프로그램들을 사람들에게 쥐어주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어야 할 때이다. 지금은 우리들과 똑같이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중생을 체험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라고 간주하는 일을 멈추어야 할 때이다. 지금은 우리들이 교회 프로그램을 위해 수고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한다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기만하는 일을 중단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팔아 줄 세일즈맨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원하신다.

 

 

내친김에 책꽂이 속의 책 한 권을 더 꺼내 펼쳐본다.

연대 교목인 한인철 교수가 번역하고 한국 기독교연구소에서 발간한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그 묵직한 책을 들춘다.

서문에서 한국교회는 양적을 점차 쇠퇴하고 있으면,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는데 직접적 원인은 오히려 교회 내부에 있는 것으로 지적외고 있다는 것이다.

 

1. 자폐증 3.88% 교회 밖의 사회봉사비로 사용. (평균)

2. 교회성장을 휘한 반지성적 분위기와 비민주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 아니라, 영적 구원을 위한 기과, 조직으로 이해함. 자기 반성과 비판 없는 개인이나 단체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3. 기복적, 내세 지향적 신앙으로 개인 영혼 구원에만 치중함으로, 이 세상에서의 책임과 공동체적 의무가 약화된 때문.

4.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내세워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할 뿐, 성서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정직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적 태도로 매도하고~~<머리가 거절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하지 못한다 /존 쉘비 스퐁 감독)>

5. 예수는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경배할 뿐,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야하는 삶의 모델로는 이해되지 않고 있기 때문.

6. 교인들의 지적인 요국도 더욱 왕성해졌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문턱에서 이성을 벗어놓고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

 

...한국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길임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않는다면... 점차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어, 한국교회는 붕괴를 자초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너도 가려느냐, 는 예전처럼 교회에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라, 교회가 주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큐티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책장을 뒤지고 온갖 소란을 다 떠는 나를 용서하시라. 이것도 큐티라고 나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책상 앞에 놓인 교회 수첩을 펼쳐놓고 권사와 집사 수를 세어보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도 큐티의 일종이다. (^^)

원로 권사 100 명 이상, 권사 200명 이상, 집사 500명 이상. 정말 온 교인의 임원화가 여실히 드러나 있는 교회 수첩이었다. 이 많은 임원들이 각자 한 가지 씩 일만 한다면!!

활성화되지 않을까...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었을까. 아, 그렇구나. 디모데 후서를 읽으면서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에 대한 구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제일 먼저 우선되어야 할 예배에서 그 경건의 위상을 살금살금 갉어먹는 광고시간과 그 광고시간에 광고해야 할 축제나 이벤트나 집회가 경건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심신의 분란을 자초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를 원하는 교회 집행부의, 그 파쇼적이면서도 대그룹의 경영 안을 본뜨려고 애쓰는 행태를 성토하려고 하다 보니 책 몇 권을 되풀이해서 읽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 이제부터는 정말 큐티를 큐티답게 해야겠다. 지금 반성하고 있다. 적어도 큐티 시간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장을 뒤지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런데 또 이렇게 무수하게 떠오르는 다른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또 둥근달처럼 번쩍 떠오르는 생각을 이어갈 밖에....

 

이것 역시 엊그제 대 심방 때의 일이다.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그렇겠지만 봄 가을에 대 심방이 있다. 목사님이 가정을 방문하여 각 가정의 고민과 기도제목 또는 어려운 점이나 상황을 알아보고 같이 예배드리면서 목자와 양 간의 화목을 다지면서 하나님 앞에 초점을 명확하게 하는 좋은 시간이다.

 

내가 맡은 속(장로교에서는 구역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은 대체로 연세 많으신 분들이 속도원으로 있었다. 그런데 대심방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말이 오가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교회에서 끝발도 있고 일도 많이 하시고 직급도 높으신 속도(연세도 여든을 바라보는)가 제안을 하셨다. 속도들이 돈을 모아 목사님이 봉투를 드리자, 는 것이었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속을 인도하다보니 그런 눈치는 나도 알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목사님이 심방하는 것에 대해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과, 고이 모셔둔 쌈짓돈이라도 모두 꺼내어 아낌없이 드리고 싶어 하는 순수 열정과 순수 사랑을 말이다. 어르신들은 목사님 섬기는 것을 예수님 섬기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평소에도 많이 느끼고 있었다.

목사님께 향한 사랑과 정성은 매우 갸륵하게 생각되었지만 인도자인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었다. 각 개인이 우러나와서 액수에 관계없이 사랑을, 마음을 따뜻하게 표시하는 것은 뭐라고 말할 계재는 아니었지만 회비 걷듯이 강제적으로 돈을 걷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 단호하게 말렸다. 그냥 각자 하시지요.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형편이 어려운 분도 계실 터이니 말입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람은 나를 말함이었고 형편이 어려운 분은 또 다른 가난한 속도를 말함이었다.

은혜롭게 금요 속회 예배 잘 드리고 친교 시간에 왈가왈부 설전이 오갔다.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각자 개인적으로 하고 싶으신 분은 그냥 하시지요. 결국 반 강제적으로 모금 운동(?)은 안하게 되었지만 그 어르신은 매우 불쾌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못 본척했다.

대심방은 목사님들이 해야 할 의무사항일 것이다. 목사님께 감사한 사람은 살그머니 봉투를 넣어드리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교회를 섬기고 목사님을 섬기려고 하는 그 마음은 아름답다. 하지만 섬기는 방법이 어째서 반드시 돈 봉투여야 하는가. 나는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목사님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인지 고지 의무 태만이다. 사랑의 편지를 쓸 수도 있고, 목사님 손을 잡아줄 수도 있고, 중보기도 명단에 가족보다 먼저 올려놓고 날마다 기도하는 것도 목사님을 섬기는 방법이다. 그 다양하고도 넓고 깊은 방법들을 알려주지 않아서 교인들이 돈 봉투를 목사님 주머니에 넣어주어야만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그 좁은 소견들을 왜 빨리, 정확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고쳐주지 않는 것일까!

 

(후일담. 다음 해 대심방 때는 어르신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 것이다.

순진하고 신앙심 깊은 어르신들에게 이런 저런 이론을 들이대면서 설득시킬 여력도 없었고,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들의 뜻을 따랐다. 속도들의 소원대로 돈을 모아서 봉투 하나를 만들어 우리 속의 이름을 써서 목사님께 드렸다. 봉투를 드리면서도 어쩐지 내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아, 봉투를 드리면서도 왜 그렇게 씁쓸하고 마음이 부끄러웠는지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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