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5장 팔복
나는 큐티를 처음 해본다. 이렇게 숙제를 내주니까 비로소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생긴 것을 감사한다. QT가 무엇인가. Quiet Time. 조용한 시간. 결국 마음자락을 빗자루로 잘 쓸어놓고 그 정결한 마음의 터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수십 번 이상 읽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설교를 들었던 말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큐티>라는 카테고리 안에 정식으로 집어넣고 내가 말씀을 생각해본 것을 솔직하게 적어놓을 생각이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무리, 즉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신 말씀이다. 전후를 좀 살펴보니(목사님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앞뒤를 연결시키라고 하셔서)무려 7장까지 계속 산상설교를 하시고 계셨다. 다른 말씀들은 바리새인이나 제자들 등, 국한되어있는 대상이었지만 이 말씀은 일반 대중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지 않을까. 그 첫마디가 복에 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람들도 복에 대하여 예수님 보시기에는 잘못된 인식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여기에서의 복은 받는 복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복을 찾아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구약의 신명기 등에서 보면 조건적인 복이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인데 반해 시편 제 일편에서 나왔듯이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에서 시작하여 여호와를 아는 것이 내게 복이라,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하라,로 끝이 난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에서부터 그 <원함>을 이루어주는 주체인 ‘여호와’까지 시선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에 이르러서는 복에 대한 의미를 다시 설정하고 있다. 복의 기준은 사람의 마음에 기초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 자, 등등.
믿는 자의 결실인 성령의 열매도 이와 비슷하다. 마음의 상태에 준하고 있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곰곰이 말씀을 살펴보니 참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복을 받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긍휼히 여겨야 한다, 등등 교훈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선언문이다. 이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복이 있도다! 천국의 너희의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복이 있도다! 너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장정만 오천 명)에게 진정한 기쁨과 위로를 선언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낀다. 그곳에 모여 있는 무리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고, 애통해하는 자들이고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고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선언 하신다. “너희들이 바로 복 있는 자들이지, 저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당시 특권 계층, 종교 지도자등)이 결코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다. 너희들 현 상태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힘없고 빽 없고 돈 없고 지식도 없는 민중들을 향하여 <복 있는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정말 멋지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자들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이미 우리 안에는 심령이 가난한, 애통하는, 온유한 등등의 성정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숨겨진 그것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본문에서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자신의 수양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가 그러하다.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이다. 애통하는 자( 타인에게), 온유한 자(타인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타인에게) 화평케 하는 자(타인에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대중에게).
결국 예수님은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는 것과 그렇게 다스린 자신으로 남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었던 것은 구약에서는 말씀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예수님은 율법(말씀)을 읽어라, 묵상하라, 등등의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본문 뒤에 연이어 나오는 설교는 주로 행동거지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말해주고 있다. 즉, 신자는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은 신자에 대해 교인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믿는 무리, 믿지 않는 무리에 대한 구분도 없으셨다.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구분하여 준엄하게 꾸짖으신 사회 계층은 외식하는 지식층이나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늘 따뜻하게(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함을 보시고 마음아파 하셨고) 사랑을 베푸셨다.
친구의 소설이 평판이 좋은 문예지에 실렸다. 나는 부러워서 배가 살살 아파왔다. 집에서 혼잣말로 ‘나보다 별로 실력이 나은 것 같지도 않은데 친구는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데, 더구나 그 친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대체 왜 안 되나’ 하면서 투덜거렸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매일 골치 아픈 질문을 하거나 지적을 많이 하곤 하면서 목사님을 너무 괴롭혀서 될 일도 안 되는 거 같으니 이제부터는 교회에서 입 다물고 목사님들을 좀 덜 괴롭히라는 것이다. 그 말 듣고 남편과 한 판 붙을 뻔 했다. 궁금한 것은 물어보는 것이 당연하고, 좀 이상해 보이는 것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은혜롭게 넘어간답시고 은근슬쩍 불명확하게 넘어가는 교회 제반의 일을 진행시키는 태도에 대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인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쓸데없는 질문이라면서 무성의하게 답변한다든지 이리저리 회피하는 것은 목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로 지적하는 사람들은 장로님이나 목회자들이다. 왜냐 하면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순진하고 순수한 교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이라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특권이라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이나 지체 높으신 직분을 가진 분 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큐티 하면서 남 흉보거나 욕하면 안되겠지요? ^^ 이만 하겠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당시 민중 틈에 끼어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나를 떠올린다. 나는 지금 팔복을 선언하시는 예수님과 같이 있다. 지금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애통하고 있구나, 너는 복 있는 자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니? 네가 바로 복 있는 자다!
나는 노력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천국에서 살고 있고, 위로를 받았으며,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배부르며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있다. 감사하다.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마음을 비우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없고 내 자아도 사라지고 깨끗한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려고 애쓰는 사람.
내 주위에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애통해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온유한 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일단 교인, 평신도에 대해서는 온유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내 뜻을 분명히 밝힌다. 예스맨만 있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어느 관공서 포스터에 써 있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았다. (어떻게 사람이 있는 곳에 예스만 있겠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와 교회안의 문제. 늘 촉각을 세우고 판단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진리는 누구의 눈에나 보이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열심히 찾고, 열심히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귀한 보물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세상 것들을 비우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화평케 하는 자. 내 인생의 좌우명 중의 하나가 내 마음속에 꺼림직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지금 거의 그렇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내가 있으면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하는데 그것은 화평케 하는 자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농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굉장히 심각하고도 어려운 문제다. 인도자 공부시간에 목사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 하셨는데, 예수님을 위하여 확실하게 핍박받은 것만을 십자가라고 말하라고 분명히 밝혀주셨다. 그 외의 삶속에서 힘든 부분들은 그냥 <고생>이지 십자가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의 인생에서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고생>이라고 이야기할 것도 거의 없으니 나는 대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복 있는 자다. 나는 많은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좋다. 사랑한다. 나의 좌우명이 되는 성경말씀. 시편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