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깨어 하릴없이 화장실에 드나들고 물을 한 컵씩 마셨다. 나의 몸종처럼 옆자리에 계시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끔찍하게 더디 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놀라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꿈조차 들쑥날쑥이었다. 뭐지?
오늘도 한 시, 두 시, 세 시 마치 자명종에 깨어난 것처럼 눈을 떴고 습관적으로 화장실에 들렀고 물을 마셨고 한숨을 쉬며 다시 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다시 한 시간 후 눈을 뜬 것을 보면 꼬박꼬박 잠은 든 것 같다.
네 시 넘어 아예 자리에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
아, 어제 술김에 글을 쓴 거 빨리 지워야 할 텐데...
그러면서 새벽교회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그게 기도였을까) 제일 꼴찌로 예배당을 나왔다. 산책은 꿈도 못꾸고 집으로 돌아와 곰국을 다시 끓이고 밥을 앉히고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아 할 필요도 없는데 괜히 화장을 하면서 일단 루이스 강의를 들었다. 참 좋았다. 아주 좋았다.
기어이 이곳저곳을 뒤져 그 철학자의 블로그를 알아냈고 그곳에서 다시 루이스 강의의 리포트를 발견하고 미친듯이 좋아하다가 프린트했다. 입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그러면서 아참, 어제 쓴 블로그 글 지워야지 하면서 이곳에 들어와 읽어보니 뭐....과히 지울 내용은 없었다.
아니, 알딸딸해서도 그렇게 글을 술술 잘 이어나갔단 말이야? 하면서 내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하하.
오늘은 새벽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정중하게 여쭈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켜주세요, 플리이즈!
협박이었지만 엊그제 팟빵 영어에서 배우기를 무조건 뒤에 플리이즈를 붙이면 부탁이 된다기에 하나님께도 써먹었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과연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도 목록을 쭈욱 나의 뇌속에 적어주시옵고
그 목록을 하나하나 행하면서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도 주시옵고 (비록 이는 악물었지만 말끝마다 Please를 착실하게 붙였으므로 간절한 부탁으로 변했을 것이다) 망신 당하거나 수치 당하거나 하는 짓꺼리는 좀 덜 할 수 있도록 절제의 영도 더불어 주시옵고...
그러고보니 새벽에 예배당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 귀가 따가울 정도로 땍땍거렸군.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하나님이 설마 내가 싫어하는 것을 굳이 하게 하실까... 내가 좋아하는 것, 일테면
1일과 15일 업데이트 되는 팟빵 문학강의를 연애하듯 떨리는 마음으로 듣는다거나 이리저리 펼쳐있는 책 몇 권을 맨 뒷장까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본다거나 좀 전에 프린트한 루이스 강의록을 형광펜으로 밑줄그으며 열공한다거나,
어느 순간 그분이 오셔서 하얗고 광활한 한글 파일에 이과수 폭포처럼 글을 쏟아낸다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블로그 글을 대강이라도 정리하여 웬만큼은 미수꾸리(ㅋㅋ)를 해놓는다거나 하여튼!
지금 막 필이 왔다.
9월은 정리의 달. 아무리 귀찮아도 글을 정리해보자. 그것은 방학숙제처럼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성향은 역시...혼자 놀기... 인 것이 확실하다. 생각만 해도 이처럼 즐거우니.
아, 며칠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쫌 힘들었으니 이제 쫌 고독해지고 싶다는 말씀이징~
나의 삶에서 '따로 또 같이'의 비율은 아마도 8: 2정도 되는 것 같다. 딱 그만큼이 나에게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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