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순설, 2015

떡국 자랑질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2. 20.

나의 하나님이여, 설날 떡국은 드셨나요?

주님 앞에서 자랑질을 좀 하자면 올해 떡국은 이제껏 제가 만든 것 중에 최고였어염.

일단 국물이 좋았어요. 한 달 전쯤 푹 고아 냉동실에 보관해 놓았던 사골 두 통을 녹였구요. 위에 동동 뜨는 약간의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거했고요. 사골 국물에 한우(세상에, 내가 한우를 먹다니) 아롱사태를 큼직하게 한 덩이 넣어 다시 오래오래 끓였거든요.

아롱사태가 푹 고아질 때까지 말씀 한 바닥 듣고, 필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틈새시간을 아주 잘 활용하기도 했지요. 기도시간에는 우습게도, 하나님 떡국 맛있게 끓일 수 있도록 도와주세염, 하는 기도도 빼놓지 않았어요. 올해는 정말 성공적인 떡국으로 집에 모이는 모든 인간들을 놀래키고 싶었거든요. 하하.

 

집개로 건져올린 아롱사태 덩어리를 맨손으로 호호불며 찢어서 떡국 고명으로 버무려 놓았는데 요것이 어찌나 깊은 맛이 나던지요!

신이 나서 흰자 노른자를 갈라놓은 고명도 만들고 돌김도 몇 장 구워 가위로 잘 썰어놓으니 고명이 제법 칼라풀 했어요.

게다가 만두 품목중 비싼 축에 드는 '비비고 만두'를 열과 성을 다하느라 이전처럼 국속에 풍덩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일단 찜통에 쪄 소중하게 건져 놓았어요. 혹여 속이 터질까봐 불 옆에 서서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하나님도 아시지요?

그리하여 이쁘장하게 익은 비비고 만두를(자그마치 스물두 개) 베란다에 내놓아 서서히 식어가게 만들어 놓고

이전처럼 떡국떡을 국물 속에 풍덩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에 담그어 놓았어요. 아, 맛집 블로그의 힘은 이런데서 나타나요. 국물이 흐려지지 않게 하는 노하우를 적어놓은 블로그를 발견했거든요!

 

집안이 떠들석하게 십분 상관으로 모든 인간들이 모여든 직후 펄펄 끓고 있는 사골 국물에 떡국떡을 수장시킨 후, 그것이 익기 전 부리나케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지요. 와, 대단하다~

내가 차린 음식을 먹는 인간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말했듯 올해도 어김없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신이 저절로 났어요.

게다가 매해 설날 떡국의 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서 퉁퉁 불은 떡국을 이틀동안 먹어치워야 했는데 올해는 신의 한수로 완전 양을 적당하게 맞추어서 남긴 국이 거의 없었어요. 그것도 신기방기. 하나님은 요즘은 내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긴 하는가봐요?

몇 인간은 두 그릇도 먹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딱 맞아 떨어졌는지!

 

바닥에 깔려있던 한 그릇 분량의 남은 떡국은 내가 동생 가족들과 고모리에 가서 파스타와 커피, 아이스크림, 고르곤졸라 피자를 진냥 퍼먹는 동안 집에 남아 뒷정리하던(이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완전 자발적인 봉사차원이었어요. 남편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방편으로 이렇게 뒤처리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는 거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남편님이 마치 부엌데기처럼 싱크대에 서서 그것들을 해치웠다네요. 약간 미안.

시원하고도 깊은 맛이 나는 사골 국물은 설날 아침 떡국 넣기 직전, 두어 그릇 분량을 빼돌렸는데 그 국물이 아직 가스렌지 위에 놓여있어요. 그렇게 다시 또 떡국을 만들어 먹으면 그럼 나는 또 한 살 먹는건가요? 설마? 두 그릇 더 먹으면 두 살 더 먹는거 절대 아니죠? 나이 더 먹는다고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분명 떡국을 더 끓여먹을테지만요.

아무튼, 이번 설날의 떡국은 최고였어요. 그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어요.

 

나의 하나님이여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집에 꾸역꾸역 모여든 사랑하는 동생들과 동생 가족과 맛있는 식사를 하게 해주신 은혜에 감격합니다. 진심.

대학교도 등록금도 아니고 고등학교 등록금 한 번 대주지 못하는 고모를 둔 조카들에게 너무 미안했고

아직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날 닮아 낙천적이고 약간 맹하지만 한없이 착한(이것도 나를 닮았죠) 두 남동생에게도 어쩐지 미안했지만 우리 유미 빼고는 남자들만 득시글득시글하는 집안의 풍경이 평화로운 것도 참 많이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사는 인간은 나 뿐 아니라 내 동생도 내 동생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어요.

도인에 가까운 우리 둘째 동생과의 대화도 참 즐거웠어요. 마음, 과, 안과 밖의 개념에 대하여 풀어놓는 솜씨에 귀를 기울이면서 뭐야, 내 동생이지만 거의 초인의 반열에 서 있군, 하면서 감탄했어요.

 

아이고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려고 하네요. 어제 설날 아침 떡국 잘 끓였다고 자랑질하려고 들어와설랑. ...잘하다가는 또 삼천포로 빠질까 싶어 이만 끝내려고요.

설 명절 연휴를 날마다 하루 몇 시간씩 가족 친교 차원의 고스톱으로 즐거운 시간을 주신것도 정말 감사하고요

그제는 조금 잃었지만 어제와 오늘은 완전히 다시 따게 해주신 것도(ㅋㅋ) 감사드려요. 하지만 우리 이쁜 하나 돈을 너무 많이 따서 미안하니까 내일은 조금 잃게 해주시고 특히 우리 하나가 심기일전해서 많이 많이 따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고스톱을 잘치시는지 잘 모르지만 그것도 은근 재미있답니당. 혹 자녀들의 기도소리가 진력나시거든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체면상 자리잡고 고스톱판에 끼어들지는 못하시겠지만 옆에 앉아 계시다가 광 팔면 한 개 200원입니다.  

내일, 혹시 오실건가요? 미리미리 연락 좀 해주세요. 오신다면 떡국 한 그릇 더 끓여 드릴려구요^^

 

 

'사순설,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침묵과 나의 침묵  (0) 2015.03.01
소주 한 병을 반성함  (0) 2015.02.26
현장에서 붙잡힌 년의 생일^^  (0) 2015.02.24
월요일의 감사  (0) 2015.02.23
옛날 사진을 보았다  (0) 2015.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