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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새벽, 코람 데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이 카테고리는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인터넷 동영상 설교를 들으면서 받아 적은 글 모음이다...)

 

새벽, 코람 데오!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신속하신 응답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너는 죽을 것이다, 하고 최후통첩을 하셨는데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금세 번복을 하십니다.

15년 더 살아라.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너무 크고 중요한 일에 대하여 신속하고 단호한 응답을 주신 것이지요. 이 응답의 확실성을 위하여 히스기야는 징표를 구하고 하나님은 시간을 후진시켜버리는 일영표를 보여주심으로 약속의 확실성을 증거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분이요, 기도하면 지체하지 않으시고 전력을 기울여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 성경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읽는, 혹은 듣는 1차 청중은 이미 포로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70년의 포로 기간,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선민이 이토록 맥없이 팔릴 수 있으며, 이토록 맥없이 쫓겨날 수 있는가에 회의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포로 된 백성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습니까!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도 예수를 믿는 어떤 성도들에게는 당연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충격이 됩니다. 나는 ‘충격파’입니다.

 

간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응답받은 자만 세상 앞에서 간증합니다. 간증하는 자가 많습니까, 간증 듣는 자가 많습니까. 소수가 기도의 응답을 받고 많은 사람은 응답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신앙의 삶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없는 쪽이 더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에 도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신가.

좀 더 지나고 나면,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고,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 있는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을 받으리라’에 꽉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뼈가 저리게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지만 응답받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기도라는 것을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심 어린 기도에 감동하셔서 무슨 결과를 주셔야 할 것이라고 아주 쉽게, 종종,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인생을 바치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예수가 걸은 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험난한 인생, 고단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 인생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과 함께 현실 속에서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이지요.

인생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정하신 그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구체적인 시공간과, 그 시공간을 걸어가는 우리의 존재를 말합니다.

 

신앙은 <현실>과 <성경>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텍스트라는 의미는,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 약속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성경의 말씀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고 구체화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아차, 하면 무형의 것이 되고 맙니다. 관념이 되고, 이상이 되고, 초월이 되고 말지, 현실화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물리적으로는 전혀 납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의 응답은 ‘현실을 바꿔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조건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인생을 사는 한 인격과 영혼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극복하고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방식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영혼, 믿는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은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처절한 인생을 산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더 이상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었다... 그런데도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하나님이 나를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다윗은, 결국 예수가 성육신으로 보여준 것처럼, 신자된 인생의 고단함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인간이기를 극복하는 싸움이지,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여 편안하게 사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빌립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끝없는 순종은 나를 포기하고 나를 하나의 물건같이 하나님의 수중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맹렬한 의지>를 가지고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깊은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불러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도는 일종의 주술행위밖에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한 것으로 내 책임이 끝나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의지를 총동원하여 동의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물이 아니라 인격으로 바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잘라내어 기도하고 전도하고, 가 아니라 우리의 시간 전체를, 우리 삶을 하나님이 원하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삶, 인내하는 삶, 신앙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성육신의 인생을 살게 되는데 이 인생을 나 혼자 살지 않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이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볼품 없고 사소하고, 거기에 무슨 의미 있는 일이 있겠는가 싶은 모든 부정적이고 외면하고 싶은 고통의 자리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이 끌어안으시는 영역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인생 현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걸으라, 하는 인생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운명론으로 붙잡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어진 자리를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가 그러하신 것처럼 시공을 우리가 걸어 나가면서 하나님께 바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 현실의 욕구를 채우고, 좀 더 나은 곳으로, 또 더 나은 곳으로, 그렇게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셨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시작입니다. 더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을 모시고, 어떤 경우, 어떤 인생을 걸어가는 내가, 자기를 비우고 순종하여, 십자가를 쫓는 예수를 다시 쫓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띄는 특별한 신앙생활을 요구하니까 어떤 멋진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자랑할 만한 어떤 사건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걸어간 길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오셔서 당신이 걸을 수 있었던 j제한된 발걸음에 고정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위협과 유혹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다,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할 말 없게 증명하고 싶다,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요청할 때마다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의 예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약속, 나를 믿는 자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바로 그 약속을 지니십시오. 이것이 바로 신자의 큰일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중요성이고 핵심입니다. 이 승리가 책임이자 특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소중함과 귀한 것을 고백합니다.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주님을 모시고 가기로 약속합니다. 울어야 할 때 울기로, 한숨 쉬어야 할 때 한숨 쉬기로. 그러나 우리의 인생과 현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외면하거나 도망가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우리 마음에 인내와 순종을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