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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박영선 목사님 가라사대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가라사대

 

 

 

한 개인의 인생을 평가할 때 ‘신명기’적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하지만 늘 ‘신명기’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에게는 ‘신명기’적인 인과응보의 법칙도 있지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법칙도 공존합니다.

 

문제는 언제 하나님이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우리를 맴매(!)하실른지, 혹은 은혜의 법칙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음으로 우리의 삶이 불명확하게 전개되곤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속 터지게 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속이 터져 기절 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디스트적인 면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농담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두 개의 텍스트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성경, 그리고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진리를 선언하는 것과 그 진리가 사실로 구체화하는 현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지요. 문제는 그것들이 결코 아름답게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당혹감과 모호함 속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는 어느 때는 너 이렇게 잘못했으니 요런 벌을 받아야 하것다, 하는 식의 인과응보적으로, 또 어느 때는, 어찌하오리까 이 죄인을,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이과수 폭포 같은 은혜로 깜짝 선물을 하는 바람에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난 별로 알지 못하는 유진 피터슨이라는 신학자이자 신앙인이 있는데 그 인간이, 아 글쎄,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현실은 갖가지 궂은일과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모욕적인 악을 겪는 곳이며 이처럼 이해할 수 없고 꼴사나운 중간 지점이 눈부신 시작과 영광스러운 끝과 통하는 길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아! 동서양을 간극을 뛰어넘는, 신앙의 괴리를 뛰어넘는 피터슨에게 ‘님’이라는 한국식 존칭을 꼭 붙여주고 싶습니다! 피터슨님은 유난히 비실비실하게, 면목없이 사는 대한민국의 크리스천을 어쩜 그렇게도 잘 아시는지! 혹시 한국에 와 보셨는지...?

(때마침 귓구멍으로 레드 재플린의 ‘Stairway to Heaven' 도 짱짱하게 들려오지만서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과연 오를 수 있을 것이냐, 한 스텝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어디론가 추락해 버릴 것이냐를 고민하는 저 이하, 한국의 맥 빠지게 사는 크리스천을 위하여 이렇게 달디단 말씀을 늘어놓으시는 피터슨님께 일단 감사의 인사를 올리옵고)

 

갖가지 궂은일과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모욕적인 악을 겪으며 도대체가 이해할 능력도 없이 꼴사납게 살아가는 현실 속의 크리스천들에게, 피터슨님은, 그것은 중도에 있는 과정이니라, 그것의 처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눈부신 시작과, 하나님이 또한 도장 찍고 복사까지 해주신 영광스러운 끝에서 찰싹 달라붙어 이어져있는 하나의 길 안에 존재하느니라, 라고 자분자분 설명해주셨으니, 말씀을 듣는 이 밤,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결국’을 만들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 되심을 쉬지 않고 계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계’로 일하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계를 감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계라...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무슨 일이나 무엇에든지 신자다워라, 하고 요구하십니다. (아, 정말 신자답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나의 한숨이 보태집니다.)

 

 

강해 설교가의 말인즉슨,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바꾸고 슬픔을 해결하고 억울함을 풀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냥, 그냥 우리에게 울라고 하십니다. 한숨을 쉬고, 그냥 한을 삭이라고 하십니다. 내 자신과 내 운명은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그냥 믿어버려라! 하고 명령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당하는 슬픔과 실패를 그냥 용납하라고 하십니다. 단, 하나님 없이 당하는 실패와 하나님 안에서 당하는 실패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억울할 수 있고, 고통당할 수 있답니다. 시편을 보면 대개 피맺힌 하소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무수한 원통함과 비탄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좌절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문제들, 건강, 자녀문제 등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에 대한 결제수단으로서의 해결이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한계’속에서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능을 요구하지 않고, 한계를 인정하게 만드십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훈련은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절망과 슬픔마저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아래서는 결코 우리를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리를 손해 보게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는 신자의 특권을 잘 누리면 사십시오. 제발 신자의 특권이 무엇인지 파악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떤 상황에서든 무슨 일에서든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에 우리의 특권이 있고, 자랑이 있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찾아오시더이다, 하는 결론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큰소리치고, 혼자 박수치거든 그대로 인정하시고, 우리는 그냥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자랑이나 곤고나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