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한 번도 당신의 사랑을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기에는 너무 못나고 완악하고 미련하게 구는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그의 열심히 식지 않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질투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질투는 사랑의 한 형태인 것이지요. 사랑이 상처를 받아 분노로 변하는 것, 질투. 사랑은 감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최선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질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며, 배워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고 발전이며 승리인 것이지요.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 혹은 무관심이라고 말하지만 어디서인가는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정열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신자로서 현실을 살 때, 신앙 현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생각없이 살면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민하지 않고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모호’하게 살아버립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과정을 외면해 버립니다.
말씀을 따라서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은 하지만 그냥 ‘다짐’만 할 뿐입니다. 정말 피흘려 열심히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는 작정을 했고, 이미 하나님께 투표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비극으로 이끄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너무 쉽게 읽습니다. 읽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요.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너무 기특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생각한다, 는 것입니다. 세상의 갖가지 요구는 우리를 유혹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 답이 아니다, 까지 알고 있지만, 구태여 뭘 따져보겠느냐 하면서 대강 넘어가고 맙니다. ‘깊은 생각’을 안하기로 작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바칠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의 갈급함을,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대체 뭘 하셨는데요?
그냥 나는 신앙을 고백했고, 성경을 읽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동의만 했을 뿐입니다. 동의만 했을 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쉽게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처절합니다. 죽음을 직면하고 있지요. 사람이 겪는 일 중에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갈 구멍이 업서는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여 이제는 살 소망이 없는 곳까지 다다른 바울은 죽음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편을 들어봤자 그 끝은 죽음입니다. 세상은 죽이는 것이 엔딩인 것입니다. 세상을 편든다고 죽음을 면하게 해주지는 않는 것이지요.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신앙은 이렇게 해서 나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깨닫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죽음밖에 주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안에서의 부활생명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밀고 계십니다. 죽음 직전까지.
참으로 좋지 않은 신앙인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이 좋은 것을 순진무구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아닙니다! 어린아이 같다는 말에는 무력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처절하게 고민해야 하고, 드디어 죽음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직면하지 않고는 부활의 힘을 가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신 하나님이 우리도 죽이실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부활의 생명을 체득할 수 없으므로 항복하십시오. 사랑은 무서운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팝콘 먹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나요!
신앙에는 사람에 따라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계기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과, 인생의 반전을 통하여 사랑을 그의 삶에 담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얼마나 감동을 가지고 있느냐와 삶을 담아내는 실력을 가지게 되는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생각 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을 키우십시오. 하나님이 목적한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진보는 그래서 매일의 갈등과 고통 속에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일을 통하여 손톱만큼씩 자랍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라는 것 같지 않게 자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신앙이 커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 알아차립니까? 옆에서 알아봅니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는 일들이 자신의 신앙 인격과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자가 되었느냐, 에 결부되지 않은 채 그런 일을 대신하여 쓸 수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행동으로 신앙이 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이 크는 것은 생각하고 분별해서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슴이 뜨겁고 감동이 넘쳐나고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이런 것들이 신앙은 아닙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 내가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 주어야 하고 오래 참는다는 것, 그것이 어디 쉽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나에게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공부하듯 사랑을 연습하고, 또 하고, 다시 또 해야 합니다. 신앙이 저절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긍휼, 자비, 이런 것들을 실천하려면 삶 속에서 계속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몰라 일찌감치 체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구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서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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