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브레이크 타임
아이를 가졌으나 해산할 능력이 없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것은, 신앙은 가졌으나 지킬 힘이 없다로 대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를 포함하여 우리 신자들은 분명 신앙인이지만, 현실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다 극복할 만큼 여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히스기야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알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을 견디어내기에는 믿음생활이 넉넉하지 않아 당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영웅’들을 곁에서 보기도 하고 간증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 기적적인 이야기를 접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을 옮겨드리겠습니다.
“신앙이란, 현실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경험하면서, 고통스럽고, 떨쳐버릴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을 통하여 빚어지고 굳어진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각 개인이 개인의 삶속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간접적으로 알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셔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심판은, 우리가 우리 멋대로 기대하고 근거하는 허상과 기만을 부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우리와 세상에 대하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부서뜨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뜨려야 하는 것이지요. 신자 된 개인은, 죽음으로 내모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기반을 자신에게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까지 내모든 것이 죽음입니다. 나는 아직도 자신을 근거로 하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쓰는 그 피상성, 그것을 하나님은 강력하게 거부하십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분이라는 것을 믿지만, 그것을 진리 문제와 결부시키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불편한 것이고, 거북한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과 우리가 무력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빌어먹을 진리’로, 삶의 현장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직면한 고통은 모두, 이 세상이 내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며, 사람이 내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며, 그리고 결국 내 자신 역시 내가 기대하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치 아이히만이 종전 후 남미 어느 나라에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 정보국이 찾아 잡아 왔답니다. 그래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수용소에서 있던 한 사람이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을 맞닥뜨린 증인은 발작적으로 뒤로 넘어져 고함을 지르며 울더랍니다. 후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증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히만이 인간이 아니고 괴물인 줄 알았는데 만나고 보니 너무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역시 저 사람같이 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현대 사회가 신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이 진리와 대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매순간순간 하찮은 것들에게 우리를 내몰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들여다 볼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떠밀려 다니고, 외면하고, 표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적당한 관계 맺기’를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성을 가지고 치열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생 속으로 찾아와 쉬임없이 묻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를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대로 방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믿는 거짓’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근거로 하여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수용하는 데는 죽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죽기 않고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로서, 실제로, 죽어야 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을 근거로 하여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 내가 욕심내는 것, 그리고 세사아이 약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짓되게 유혹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자신을 속이고 평화를 사며, 아주 잠깐의 행복을 산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에 부합되지 못하는 생을 늘 살고 있습니다. 신자로서의 책임과 그 무서움을 모릅니다. 자기의 뜻을 거스른다는 그 시련을 견디어 낼 때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기뻐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하거나 감상적이거나 요즘 말로 이벤트 성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과 진리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죽을 것 같습니다. 살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믿음으로 살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이미 선택할 수 없는 범주입니다. 예수 안에서 만난 하나님을 드디어 알게 되는 바람에 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지 않나요? 어찌어찌하다보니 우리는 신자도 아니고 세상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밖에는 답이 없구나, 하는 결론까지 이르게 되는데는 여러분이 동의하셔야 합니다.
결과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쉽습니다. 하나님이 힘들어 하시는 것은 우리를 항복시키는 것이 더 힘드실 것입니다. 내가 믿던 신앙에서부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으로까지 끌고 와야 하는 겁니다. 그 과정은 죽을 것 같은 위기, 불안, 공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당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비겁하지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쉽게 해결하려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무너지고 부수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근거를 털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가 허공에 떨어진 것 같고, 발 디딜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내일을 약속받지 못한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당신이 하나님이신 것에 항복하고 엎드려 빌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자된 현실과 진실을 직시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여러분도 목숨을 걸고 반응하셔야 할 것입니다. 실패할 수 있고, 도망칠 수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는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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