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수필 모임이 있어서 어제 아침에 완전 번개로 글을 써가지고 갔다. 성의없는 글이었다. 나중에는 많이 꼬였지만 고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버리지 뭐...
내 글은 잘 보아주지 않는 문우들 탓도 하면서, 대강 써가는 것도 그렇지만, 대강도 읽어주지 않는 그녀들의 나쁜(^^)습관 때문에 내 글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어쩌겠어. 내 주종목은 수필은 아니니까. 나는 혼자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ㅋ
20년 넘게 매달 만나 수필공부를 하는 모임이지만, 그래서 정말 많은 시간 함께 한 사이이긴 하지만 내가 글에 썼던 대화의 농도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 우울한 불만을 삼키면서 이른 아침부터 나는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으니까.
어떤 노년의 삶을 꿈꾸는지, 아니 그냥 짧게는 새해의 삶이 어떠한지 나누는데 나는 이십 리쯤 떨어져 홀로 걷는 보헤미안 같았다. 나, 같은 나이에 같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거 맞아??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신데렐라 코스프레로 딱 자정에 집에 들어왔다. 그러구러 남편 옆에 앉아 잠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데 '두 남자'라는 제목이었다) 어린 아이들 나오고, 폭력 나오고 이런 거 싫어하는데 어쩐지 흥미가 동하여 1/3정도까지만 보고, 그래도 한 시가 훌쩍 넘었기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참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비행청소년들의 비행을 엿보면서, 흔들렸다. 내가 생각하는 평온의 반대말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내가 꿈꾸는 다른 생각의 삶은 분명 저런 것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고상한' 불행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또 다시 한 시간 여를 흘려보낸 후 겨우 잠이 들었다. 꿈속도 어수선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나의 생각 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래의 글은 길거리 호떡처럼 따끈따끈하되, 밍밍하기 짝이 없는 나의 수필 숙제 글이다 ㅋ)
볕 좋은 테라스의 삶
새벽, 노란색 갓등을 켜고, 노란 불빛 속에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글을 살아있는 내가 읽을 때, 혹은 아직은 살아있는 자의 글을 죽어 있는 듯 고요한 내가 읽을 때, 모든 문장들은 서로의 기류를 타고 새롭게 변주된다. 그들이 나를 이끌고 가는 곳은 늘 경이롭고 신비하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난 것보다 더 깊숙하게 그것들에게 매료된 채 활자를 끄집어내면 가슴 어디께인가 화인 맞은 것처럼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펼칠 때부터 나는 이미 홀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깊은 사유를 질투 섞인 나의 한숨으로 채우기도 하면서. 나에게 책은 새벽이슬에 젖은 싱싱한 꽃다발 같다.
새벽의 바그너는 잠시 책갈피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무기력해진 손으로 턱을 괴게 하고 신비로운 우울을 선사하며 아직은 어두운 밖의 풍경에서 점멸하는 신호등에 시선을 돌리게도 하고 약간의 멜랑콜리와 함께 생각들을 침잠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원두커피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졌기에 하는 수 없이 누군가 선물해준 티백 원두커피를 우려내어 마시고 있다. 재정 상태가 나이질 기미가 없으므로 새해에도 티백 원두커피를 계속 마셔야 할 것 같다. 티백을 몇 번 저으면 커피색이 조금씩 짙어진다. 그 얕은 흔들림의 잔물결이 아름답다. 이디오피아 여인이 허리를 구푸리고 커피를 볶는 사진을 어제 보았는데 그 여인의 머리를 느슨하게 가린 머릿수건의 은은한 색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거의 반 년 넘게 새벽의 시간을 놓치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엊그제부터 다시 새롭게 새벽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여름 내내 집을 나갔던 가출 청소년이 추운 겨울 따스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오, 가장 평범한 시간을 가장 빛나는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이런 새벽의 리추얼이 나를 가장 나 되게 살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선천적으로 새벽을 좋아한다. 이른바 아침 형 인간인 셈이다.
열 살 안짝에도 집에서 십분 거리에 있는(주먹을 꼭 쥐고 달음질하면 오 분이다) 학교를 한 시간씩 일찍 갔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닫힌 교문 앞에서 수위 아저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때도 종종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뭉치의 열쇠꾸러미를 덜그럭거리며 다가와 문을 열어주는 수위아저씨와 아침 인사를 하던, 꼭두새벽 등교는 계속되었다.
전교생 6300명이었던, 매머드 초등학교의 놀이터는 언제나 북새통이어서 다가갈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새벽의 운동장은 말끔하게 비어있다. 싸리비 자국이 선명한 놀이터(모래 따위는 없다)의 시소에 책가방을 걸어놓고 정글짐에 올라가 혼자 놀았다.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혼자 노는 것이 익숙했고 그것이 사람들과 부대끼는(왜 이런 표현을)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고, 혼자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러한 나의 취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오히려 더 절실해지는 면이 없지 않다.
어제도, 좋은 사람들과 멋진 식사를 하고 걷고 다시 어딘가 들어가 맥주를 마시면서 함께 했는데 2% 부족한 어떤 것을 느꼈다.
나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일상에 머무는 이야기로 그 긴 시간을 일관했다. 나누는 이야기의 태반이, 정말 슬프게도, 수박 겉핥기식의 일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의 가치관이 좀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역시 허전했다. 그 갈증. 나에게는 영원히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었다.
‘알쓸신잡’같은 대화는 왜 못할까? 그만큼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은 충분히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도 나의 욕망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고 조용히 있을 것. 그냥 나 홀로의 시간을 마음껏 누릴 것.
그런 면에서, 가족이 있으나 홀로인 듯한 새벽의 시간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문득 테이블 다이어리로 눈길이 갔다.
날짜의 네모난 칸은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빽빽하게 일정들이 적혀있다. 아, 텅 비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반쯤은 여백으로 비어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 외출들은 결국 누군가를 만나는 것일 테고 그 누군가는 길거나 짧게 나의 인생의 길목에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일 터인데 어쩐지 즐겁지 않았다.
나는, 조금은 외롭고 싶다. 내가 외롭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외롭고 싶다. 사람이 그리워서 주소록을 들추고 저장된 전화번호를 누르고, 오래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고 싶어질 만큼.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노년의 삶을 ‘볕 좋은 테라스의 삶’이라고 생각했다는 독일의 철학자인 빌헬름 슈미트는 거의 모든 노년의 삶이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이 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또한 늙는 것 역시 처음이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온’하게 늙어갈 수 있는 방법을 기술했다는 것이다.
평온하게 늙어가는 법. 평온하게 늙어가는 법이라...
식은 커피를 마저 들이켠 후, 다시 물을 끓이고 다시 티백을 넣고 저었다. 다시 조금씩 짙어지는 잔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티백을 손으로 꺼냈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나를 평온하게 한다. 그러면서 나는 ‘평온하게’ 늙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내면 어디서인가 부정에의 욕구가 튀어나오고 있다. 평온한 삶이라는 것이 어째서 꼭 ‘볕 좋은 테라스’에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나의 내면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비참, 비열, 비굴, 비통, 비탄에의 열망은 어떻게 하고? 설령 그 욕망으로 인하여 나의 아름다운 아침이 무참하게 깨어진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이 마음은 어떻게 하고?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 신형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의 불멸의 책 <몰락의 에티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채우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 또한 2010년 3월 7일 오후 4시 40분에 나의 이런 생각을 글로 옮겼다.
"네가 평범한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편안히 노후를 보내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만족한 미소를 띠며 눈을 감는 것, 그런 것을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겠지만. 그래, 너는 파멸의 막바지에 다다른 불행한 죽음을 맛보고 싶은 거지? 아니, 죽기 전이라도 황폐한, 지독하게 망가진 삶의 끝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위험해서 아무도 근접하려 하지 않는 무모한 곳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어가면서,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버리는 것, 그렇게 죽어버리면 다행이겠지만 단번에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나? 피투성이인 채 가녀린 나뭇가지에 달려 자신의 알몸을 세상 사람들에게 오래 동안 보여주어야 하는 비참한 결말을 너는 꿈꾸고 있었지? 핑크빛으로 도배된 사랑이 아닌, 악취와 얼룩과 비열한 거짓말로 가득 차 모든 사람들이 더 할 나위 없이 혐오감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비루한, 비참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네 운명의 끈을 확 놓아버리고 싶다, 는 욕망을 너는 가지고 있지? 어째서 너는 그토록 <파멸>을 원하는 거지? 너의 각막, 인생의 뷰파인더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존재에게 격렬한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이내 산산이 부서뜨리기를 원하는 것이지? 네가 외면을 원한다면, 날마다 불길한 꿈을 꾸고,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죽음은 훨씬 가까이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문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죽고 싶으리만큼 고통스러운 눈물 골짜기에서 온몸이 찢겨나갈 것처럼 날카로운 욕망 위에 너의 전신을 불사르고 싶어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지. 아, 숨이 멎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가오는, 파멸의 매력을 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지? 환멸의 또 다른 환상의 끝, <아름다운> 파멸. 네가 아름답다고 명명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아름다움과 정반대라는 것도 알겠다, 그래 이쯤이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아, 하지만. 끝을 아는 인생처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그 명약관화한 예언을 앞에 두고 네가 헤매고 있는 눈물 골짜기에서 너의 구원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어쩌면 내가 원하는 노년의 삶은 사람들이 말하는 ‘평온한 삶’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노년의 삶은 ‘볕 좋은 테라스’의 삶이 아닌지도 모른다.
(원고지 2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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