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60여장에 이르는 글을 이틀에 걸쳐, 팔이 아프도록 필사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나의 귀에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씹어먹을만한 내용이므로 계속 열심히 되새김질 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기분은 정말 상쾌했고, 졸라 좋았고, 밑줄 친 문장을 다시 손목이 아프도록 일일이 받아쓸 때는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그냥 읽어넘기는 것보다는 밑줄을 치는 것이, 밑줄만 치는 것 보다는 한 문장씩 필사하면서 다시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ㅋㅋ)나의 생각. 아무튼 힘들기는 했지만 보람찼다고 해야겠다, 즐거운 토요일인데 책과 노느라고 아직도 부시시한 모습이다....
우선 내가 가장 키 포인트로 찍어 놓은 문장을 먼저 쓰겠다.
-교회는 결코 장소가 아니라 항상 사람이며, 결코 양의 우리가 아니라 양 자체이고 또 결코 거룩한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의 모임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 바로 당신이 교회이지 당신이 기도하는 그 장소가 교회는 아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감이나 몸의 때가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물이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는 거룩한 곳이란 인간을 제외하고는 없으며, 혼을 제외하고는 인간 내부에 지성소란 없다. - 존 하브릭, <인간 지향적 전도>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복음이다. 그리고 이차적이고 보조적인 사람이 만든 부대가 있다. 부대는 복음을 둘러싸고 형성된 전통, 교회 구조, 행동양식 등이다. 부대는 복음이 인간 문하에 접촉할 때 이루어진다.
낡은 부대는 터져야 하고 복음은 다시 방출되어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 여러 차례dl 혁신이 있어 왔다. 인간 본성은 보수적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새롭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복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마침내 장애물, 즉 낡은 부대가 되는 것이 공통적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낡은 부대를 부수고 복음이 다시 인간 세계를 새롭게 하도록 하신다. 복음은 우리 시대에도 새로움이다.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여전히 낡은 부대를 터뜨리고 세상으로 흘러넘친다. 부대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남에 딸 부대도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이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변화를 초래하고 변화를 산출하는 모체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바꿈이 아니라 낡아질 낡아질 때마다 반복하여 바꾸어야 한다.
급진적 복음(성경적 의미에서)을 위하여 우리는 급진적 교회(성경적 의미에서)가 필요하다. 언제나 새로운 포도주를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새 부대를 지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대변혁이 필요하다. 무엇인가 새로워져야 한다. 재도 존중주의가 개혁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적 동력을 지닌 교회가 되기 위하여 각 교단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렇게 가정해보자.
첫째, 모든 교회 건물을 매각 처분하고 그 돈을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에게 모두 준다. 이백 명이 넘는 모든 교회 신자들이 둘로 나뉜다. 상점이나 차고나 작은 홀을 필요한 대로 세를 얻는다. 교회 학교 또는 대부분의 선전을 그만둔다. 작은 그룹의 성경공부 모임을 개인 가정에서 드리면서 수요예배를 대치한다. 목사는 세속적인 직업을 갖고 교회에서 봉급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봉급을 받는 전문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교육을 받은 평신도가 된다. 평신도가 교회 제반사의 지도자가 된다. 불신자를 교회예배에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없다. 예배도 일차적으로 신자를 위하여 갖는다. 주일 아침이 아닌 다른 날에 예배를 가질 수도 있다.
전도는 새로운 차원에서 시행된다.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신중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에 관심을 갖는다. 새 교회를 개척함에 있어서 경제적 기능성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는다. 도시 교회의 물질주의의 매력을 잃기 시작한다고 가정해 본다.
그런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 교회가 성장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 교회는 사도행전을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 특수한 세부적 사항은 언급되지 않았다 해도 대략 이러한 일대 변혁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대변혁은 신약성경의 모델과 정신에 가까이 다가가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하나의 대변혁이다. 심리적, 사회적 이유 대문에 제도적 교회가 된 어떤 교단도 이런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는 3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출발부터 교회는 모든 재산을 궁핍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성직자는 회중의 자유로운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다른 세속적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일반적인 인간 생활의 문제와 짐을 함께 나누어 지되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돕고 봉사함으로 져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타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세부적인 것이야 어떻든 본질상 일종의 대개혁을 의미하며, 우리에겐 이런 대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들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가난한 자를 향한 오늘날의 복음
예수님께서 그랬듯이 교회는 가난한 자에 대한 강조를 두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층계급 사람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찾고 가난한 자를 생가하면서 교회 성장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먼저 할 일은 복음 전도이다. 사회의 구조적 부정의를 고치려는 노력에 너무 바빠서 인간의 영혼을 건지는 일을 할 수 없는 교회는 곧 불모의 것이 되어 다시는 그런 교회를 생산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복음이 언제나 제일의 강조점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사회적 문제를 비평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죄의 삯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전도는 사람들, 즉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 압제 중에 있는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 먹을 것과 사귐에 굶주린 사람들을 돌아 볼 것이다.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걸으면서 왜 그분이 죽으셨는가를 말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보기가 되셔서 전파할 것이며 더구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선포할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복음 전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가 필요하다. 중산층의 교회는 하층 계급 사람들이 필요하다. 교회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굳지 않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성장해야 한다. 대형교회의 재정 지원을 통한 구제나 사회 활동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겨히 말해서 그런 일들은 봉사의 2차적인 형태이다. 보다 더 인격적 기초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에 대치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교회의 대부분이 제도주의라는 올가미에 얽혀서 헐떡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포도주 부대는 이제 굳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단순히 변화를 요청하거나,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포도주 부대의 전체적 문제, 즉 교회의 구조가 다시 취급되어야만 한다.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모세의 계약과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은 히브리 신앙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즉 교회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모세의 계약에 있어서 세 가지 중심 요소들은 희생, 제사장직 그리고 장막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놀라운 가르침, 특별히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사장직 그리고 장막의 완성이라는 사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우대한 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인간적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제사장직은 이미 지나갔거나 혹은 모든 신자들에게 그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성전으로 동일시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이시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장막’이다. 이와 같이 신자들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도 역시 진정한 장막의 부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 거룩한 성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이기 때문이다.
조직된 교회를 향한 가장 위험한 유혹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즉 공동체를 제도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이따금 이 유혹에 굴복 당하였다 구약의 정신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직업적 제사장직을 수립하고, 성찬식을 새로운 희생 제도로 바꾸었으며 그리고 웅장한 성전들을 건축하였다.
교회론적으로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장막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완성을 보았다. 가시적 장막의 필요성은 이미 안녕을 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신앙 공동체와 그들이 마음속에 거주하심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해서 장막의 중심 사상의 하나님의 처소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사이에서 단순히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에 실제로 거주하고 계시는 것이다. 휘장은 두 쪽으로 갈라졌으며 살아 있는 자의 마음에 오셨다.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므로 성전 없는 성은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제 완벽한 교통 속에 있다. 성령의 교제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성전에 대한 거짓된 신앙에 대하여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교회가 탄생함과 동시에 실제 장막이나 성전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더 이상 성전은 필요하지 않았으며, 예배와 희생 제물을 휘한 거룩한 성소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희생 제물이 단 한 번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필요했던 모든 것이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함께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 가장 합리적인 장소는 가정이었다.
교회 건물은 교회의 진정한 본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장막의 의미는 하나님의 거처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인간 공동체 속에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을 ‘주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계약에서는 교회란 곧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 건물이 ‘거룩한 곳’이 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거룩한 장소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거룩한 장소를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을 소유하고 있다.
초기의 교회는 교회 건물들을 건축하지 않았다. 만약 교회의 건물들에 어떤 정당성을 구태여 부여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교회 건물은 오로지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만날 수 있고 도 가장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본질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확언하거니와, 교회의 건물들이란 좋게 말해 봤자 불필요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고, 나쁘게 말하자면 우상 숭배나 진배없다고 할 수도 있다.
주후 약 200년경까지는 기독교인들은 교회 건물을 지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교회의 건물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교회의 건물은 우리들의 부동성을 나타내 준다. 복음은 ‘가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교회 건물들은 ‘머무르라’고 말한다. 복음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교회 건물은 ‘잃어버린 자들이 교회를 찾아오게끔 내버려두라’ 고 말한다.
교회 건물들은 우리들이 융통성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런 예배는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며, 이 한 사람은 강단의 배역을 다루는 직업적인 연사로서 인정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되는 것이다. 즉 설교자 대 청중이며 이것은 건축물과 확성장치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다. 교회의 건물이 프로그램을 굳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건물은 우리들 사이에 교제가 별로 없다는 증거가 된다. 가정이야말로 친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정에 있던 교회야말로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예배하려고 만났던 곳이었다.
교회 건물은 우리들의 자만심을 나타내는 증명서이다. 교회는 죄인을 찾아 나서야 한느 것이지 거꾸로 죄인들에게 찾아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만심을 한껏 드러내어 놓고 죄인들을 부추기고 있다.
교회의 건물들은 우리들의 계급의식을 증명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유대인과 희랍인, 흑인과 백인, 무식한 자와 유식한 자 등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 사회학자가 우연히 열 개의 교회 건물들과 그 교단 명칭을 새긴 현판을 본다면 그는 정확하게 그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 직업, 수입, 교육 정도를 알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빛 아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하기 바란다. 교회가 생긴 지 최초 150년 동안, 기독교회는 교회 건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이때에는 교회가 활동적이었고 융통성이 있었으며, 다정스러웠고 겸손하였으며, 배타적이 아니라 포괄적이었고 또 정신없이 성장하여 나아갔다.
전통적인 교회 건물들이란 도시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것이며 종종 성경적 기독교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밑줄 친 것만 필사하는데도 너무 힘들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는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처럼 진통적인 교회 건물이 시대 착오적인 무용지물이며, 교회는 더 이상 건물에 집착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한 교회 건물도 기능적이어야만 되고 수단일 뿐이어야지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세기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거야 매우 쉬운 일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친교 때문에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친교를 단순히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시사하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교회는 또 다른 거대한 비인격적 기구처럼 보일 뿐이다. 성도들이 조직보다는 공동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교회가 조직되어 있다. 서로의 가면을 벗어던진 쾌활한 친근성, 사람 사이의 담을 넘는 공동체와 의사 교환의 감각, 글자 그대로 성령 안에서의 사귐을 오늘날의 기구화된 교회 안에서는 찾아보기란 대단히 어렵다.
-우리들의 교회들은 외적으로 보기에는 평화와 만족으로 충만한 듯한 신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심지어 가정에서조차도 종종 의사소통이 완전히 막히는 어려움을 겪음으로 혼란과 좌절을 맛보고, 죄책감을 느끼는 등 공포에 질려 있다. 내적인 고통을 겪는 그들은 누구에겐가 좀더 자신들을 사랑하여 주기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가 보기에는 모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듯 여겨지므로, 자신의 깊은 내면적 욕구를 자기만족에 차 있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 놓을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단 앞과 뒤가 다른 이중성은 교회 조직의 형태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친교 없는 교회는 다 비슷하다.
성령의 친교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신자들의 사귐이라는 수직적 차원과 성령을 통한 신자 간의 사귐이라는 수평적 차원이 그것이다. 피상적이고도 사회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교제라는 낱말은 성령의 친교가 아니다.
성령 역사의 양면성이 개인적인 면과 집단적인 면 사이의 생동력 있는 상호관계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개인적 신자에 대한 이해와 교회에 대한 이해가 모두 약화되고 만다.
전통적 교회 예배는 의식과 건축물에 의해, 그리고 원래가 강단 대 객석이라는 일방적인 의사 전달 방법만을 위해 계획된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는 성령의 친교를 체험하기 위한 타당한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의사소통이 인도자 대 청중이라는 도식으로 일방통행과 같다면, 그 모임이 기도회이건 주일학교의 학급이건 성경 역구 모임이건 간에 교회의 회합은 코이노니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성령의 자유와 성령의 사귐은 동행자이다. 즉, 성령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충분히 비형식적이며 친근한 구조를 교회는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구조를 위한 암시이다. 신자들은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또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요악하면 성령의 친교라는 사상은 교회가 1. 성도들이 함께 모여야 할 장소를 마련해야만 하고 2. 상호 의사소통이 활발히 진행되며 3. 비형식적 분위기가 성령의 자유를 허용해야만 하고 4. 직접적인 성경 연구가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구비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의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그룹에서 비형식적인 친교를 하려고 함께 모일 때에 가장 잘 경험된다.
예수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을 성령의 자동 인형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목표 설정이 성령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현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도록, 자유롭게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만, 의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피조물로서 창조자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의지를 복종시켜야 한다.
교회와 관련하여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기에 지극히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다. 교회는 교회의 성경적 의미를 되찾아 영적 성숙을 지향하기보다는 세속적 선전 기술에 의하여 회심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조작하려는 유혹에 걸려 들고 있다.
교회는 인격의 개성과 그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개인에게 진실함은 교회에도 진실함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구조여야 한다.
예수님의 정신이 교회 안에서 실재하려면 교회 구조는 개인을 위한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개인의 인격으로부터 비성경적인 편협의 면으로 치우쳐 집단성 속에 개인성을 묻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 그룹 속에 매몰되게 하지 않고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교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개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 인격의 다양성 같은 눈이나 나뭇잎의 결정체를 다양성처럼 개개인에게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가정은 교회 구조의 하나이다. 오늘날 가정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는 성경적 이해가 시급히 필요하다.
교회 구조는 융통성이 있고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발성과 자의식의 의미이다. 교회는 목회 사역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표현에서 돌파구의 다양성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구조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과제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훈련시켜 내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구조는 영적인 은사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인격의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증거해 준다. 개개 그리스도인과 전체 신앙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계발되고 사용될 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경험한다.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교리의 기초 위에서 은사들과 창조성에 관한 여지를 갖는다. 영적 은사는 일차적으로 기독교인의 개인적 경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동동체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은사는 공동체적 맥락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는 은사에 대한 오늘날의 몇 가지의 그릇된 이해는 교정되고 바로 해석되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다. 개인적인 은사는 공동체에 대한 칙임성과 상호 작용에 의해 조화가 이우러진다. 즉, 은사는 유익함을 주기 위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개개인은 각각 개발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만 하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직인 것이다. 선천적 능력은 그것이 성령에 의해 사용되고 수여되기 전에는 성령의 은사가 되지 못한다. 십자가 고난과 부활, 즉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의 원리가 여기에 적용된다. 선천적 능력은 하나님에게 헌신적으로 바칠 때가지는 무력한 인간의 노력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나의 은사에 기준한 헌신이란, 태로들 분명히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깊은 심연에서 참 헌신이 무엇인가를 안다. 여기저기서 시식하는 음식 맛이 아니라, 삶은 보다 진지한 것이요, 나의 헌신은 내가 누구며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해줄 것이다.
영적 은사에 대한 발견은 종종 실망하고 죄책을 느끼는 기독교인을, 기쁘고 효과적인 제자로 바뀌게 한다.
-나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목회를 분명히 하고, 예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게 하셨다. 내가 나의 영적 은사를 동일시하고 그 이름을 지명할 때, 내 삶의 모순된 부분이 모두 정돈되는 것같이 보였다. 나의 삶 속에서,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핵심을 발견하였다.
기쁘고도 효과적인 예배는 성령이 우리에게 준 은사를 동일시하며 함께하는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기꺼이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개념으로 보면 교회는 복음에 있어 본질적 요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이 만든 제도나 구조는 그 자체가 교회가 아니며, 그 자체는 신성한 것도 아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한다.
목사가 회중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교회 행사는 사라져야 하고 또 자연히 죽어갈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조직과 프로그램에 의하여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영적 은사를 행사함으로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의 싸움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세상의 무기로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도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병기를 사용할 때 세상의 힘은 약화된다.
오늘의 시대는 깰 때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며 성경을 통하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깨달을 때이다. 이때는 커다란 기대의 시대이다. 하나님의 병기는 아직도 약화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기이한 일을 행하리라’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아직도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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