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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생각하라

추한 그리스도인?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2. 10. 3.

추석날 아침, 거북한 단어를 들었다.

주일예배 설교 말씀에서였다.

추한 그리스도인.

두어 번 같은 단어를 언급했다. 추한 그리스도인. 추한 그리스도인.

추하다라는 단어가 주는 혐오감에 잠시 몸을 떨었던가? 참으로 듣기 싫은 단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바로 뒤에 갖다붙이니 정말 추해보였다. 기쁘고 즐거운 주일 아침,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즐거워하는 명절인 추석날 아침 추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열심히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그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내 생각에, 말씀의 진행은 방향성이 없이 계속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다.

하지만 그 말씀은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마음이 좀 답답해졌다. 이상하다.

좌우에 좌청룡 우백호로 나를 호위하는 아들과 남편은 신중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눈치였다. 둘 다 졸지도 않고 꽤 경건하다.

가장 경건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나야말로 차라리 졸고 싶었다.

 

좀 껄적지근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들이닥치는 손님을 맞이하고, 잘 대접하고, 한 보따리씩 안겨 보내고, 명절맞이 고스톱까지 잘 때리고(물론 선무당인 내가 아들의 지갑을 뒤집어 털게 만들고, 남편의 알량한 지갑마저 손실을 입혔다^^::)욱신거리는 팔을 쓰다듬을 때까지 종종 '추하다'는 단어가 맴돌았다. 이상하다.

 

오늘 새벽, 여러 말씀을 순례하고 다시 교회 훔피에 들어가 올려져있는 설교문을 신중하게 읽었다.

몇 번 읽어도 예의(?)에 벗어난 말씀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그렇게 복잡했을까?

마음에 걸렸던 내용을 다시 노트에 적었는데 이곳에 옮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아멘)

세상의 욕심에 빠지지 말고, 세속적인 것에 붙잡히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아멘)

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고 천국의 가치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아멘)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참된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해야 합니다(아멘)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본향을 잃어버리면 추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추한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가치관, 세속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말합니다(?)

고향이 바뀐 사람들은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이땅을 순례자로 살아야 하며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가진 거룩한 순례자로 사십시오...(아멘 해야하겠지...?)

 

말씀이 빙빙 돌지 않는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여기에는 두가지기 선명하게 대비되어 부각된다.

세상의 욕심, 세속적인 것,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것, 세속적인 가치, 세속에 마음을 빼앗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천국의 가치,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예수의 증인, 사명을 가진 거룩한 순례자

 

여러 단어를 사용했지만 결국 두 가지다.

세속과 천국.

이토록 피상적인 단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알고 싶었다. 선명한 근거와 친절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세상의 것은 어떤 것인가.

세상의 욕심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어떻게 살면 세속적인 삶인가.

세속적인 가치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세속에 마음이 뺏긴다는 것은 어떻게 된 현상을 말하는 것인가.

그와 반대로

천국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가.

본향을 사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의 증인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삶은 어떤 삶인가.

사명을 가진 거룩한 순례자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게 피상적으로 말고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나는 필요했다. 간절히 필요했다.

예를 들면, TV를 보지 않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 것이 천국에 가치를 두는 사람일까?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일까?

부모에게 드릴 용돈과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사이좋게 나누어 드리는 것이 천국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일까?

수십만원짜리 다이어트 프로그램 약을 사지않고 구제하는 사람이 사명을 가진 순례자의 삶일까?

부도나기 직전 돈을 빼내어 거액의 헌금을 하면서 기도하는 분이 천국에 가치를 두는 사람일까?

기어이 부도나서 교회에서 잠적하고 교인들로부터 도망가는 높은 직분 가진 분들이 순례자의 삶을 사는 것일까?

아랫사람에게 대놓고 무시하고 반말하면서 목회자들에게는 봉투 건네주는 성도가 천국의 가치를 두는 분일까?

해외여행가지 않고, 이웃에게 빌려준 돈 악착같이 받아내어, 건축헌금하면 예수의 증인일까?

친척의 경조사에는 코빼기도 안비추고 교회의 경조사에는 그 먼 장지까지 따라가는 분은 사명을 가진 거룩한 순례자일까?

술마시고 흥청망청 나도는 남편에게 마귀야 물러가라, 하면서 이불싸들고 딴 방으로 가버리는 것이 본향을 사모하는 삶일까?

짐을 잔뜩 실고 아파트 바로 앞까지 택시를 대놓고, 동전 하나도 더 주지 않고 내리면서 예수 믿으세요 말하면 예수의 증인일까?

.... 끝이 없다, 이런 의문은.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올 수도 있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발 니 몸뚱이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한다면.

하지만.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성경 빼곡하게 초지일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실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과 내자식도 어느 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미워지는 사람의 본성과의 간극을, 목회자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길 위에 있다. 그 길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세속과 하나님은 한 길 위에 '믹스 땅콩'(죄송하다 안주이름을 예로 들어서^^::)처럼 섞여 있다.

교회도 물론 세상 속에 존재한다. 교회가 뭐, 하늘 꼭대기 구름속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신앙생활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단어이다.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내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여진다. 사람들이 보고 있다,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온종일 도서관으로 병원으로 유리(?)하면서도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본향을 잃어버리면 추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니 정말 제대로 배우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본향을 잃어버리는 상황이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가

추한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누가 보기에 추한 그리스도인일까?

하나님 보시기에? 목회자 보기에? 교인들이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내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내가 내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아름답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추한' 그리스도인은 되고 싶지 않다.

더 무엇인가 쓰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누군가 고맙게도 협찬해준 마사지 팩을 뗄 때가 되어설랑^^)

 

 

추신.

추석날 밤. 남편과 베란다에 나가 나란히 앉아 달구경을 하면서 사이좋게 담배를 피우는데 남편이 말했다.

-오늘 말씀 참 좋았어. 요즘은 말씀이 잘 들어와.

예배는, 말씀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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