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오늘의 시126편은 128편까지 세 편의 시가 하나로 묶여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시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며 부른 노래라고 표제가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구원의 사건이 출애굽을 생각하든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생각하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생각하든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기쁨과 환희와 감사를 갖게 하는 성도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예배하러 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구원의 노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포로에서 구원해 주셨는가를 상기하며 찬양하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언제나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노래하며 늘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닌 어떤 사명감이나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성취감, 열심, 성과 같은 것이 우선이거나 먼저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큰 일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늘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나의 신앙을 삼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갈1:9-10절입니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의 은혜만 믿는 그 복음이 아닌 다른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아니 저주를 받아라,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열심이나 취향이 아니라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붙잡으면 저주이며 멸망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나 착한 것,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갈채를 받는 것도 자기의 죄고백에서 나오지 않고, 예수만 붙잡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면 저주를 받는 자기사랑에 불과합니다. 작금의 기독교 복음은 이것을 헷갈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인간의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주고 착하게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면 마치 그것이 복음이라고 혼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은 단지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환기키시고 더 착하고 희생하며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감동적인 이야기나 어떤 희생적인 영화나 음악도 얼마든지 습관을 바꾸고 결단도 하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있고 선행이나 도덕이나 휴먼 스토리에도 다 있는 것들입니다. 그게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지시키고 인정시키며 그래서 우리는 패역한 죄인이어서 절망뿐이고 우리가 살려면 오직 예수의 의를 붙잡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과 저주뿐임을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아무리 선하게 보여도 예수를 붙잡지 않는 것이면 그건 저주의 대상입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가 자꾸만 세상이 칭찬해 주는 착한 일 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착각을 하는 듯한데, 교회는 착한 일을 쫓아가는 곳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오직 예수만 붙들어야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절대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 복음이 세상에 대해 ‘너희는 죽은 자들이다, 너희가 예수를 붙잡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착한 일하고 최선으로 선행을 해도 그건 전부 죄다, 회개하고 예수만 믿어라’ 이렇게 사정없는 칼을 대는 것인데 어찌 교회가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요15:18-20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죄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고 교회에 다니지, 그런데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느냐? 맞습니다. 왜 자꾸 반복을 할까요? 그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구원이란 한 번에 받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신분의 구원이 있고(칭의) 그 다음에는 나의 실존이 예수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 수준의 구원(성화)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신분의 구원은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때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과거형이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성화의 구원, 수준의 구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현실입니다. 신분의 구원은 받았지만 수준의 구원에서는 여전히 죄에 패배하고 승리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실존인 현실에서도 자기의 노력과 선행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며 성화에서도 오직 예수를 붙들어 그 의를 덧입고 예수로만 완성이 되어감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126:4을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왜 ‘남방 시내와 같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까? 네게브, 그러니까 이스라엘 남방 지역의 시내들은 보통 때는 강이 아니라 길이며 그냥 평지입니다. 평소에는 전혀 시내인지 강인지를 알 수 없게 길로 쓰이는 지형입니다. 완전히 말라 버린 생명력이 없는 딱딱한 흙에 불과한 지형에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이 시내들은 갑자기 물길이 되어 말라버린 강바닥을 바꾸고 바짝 타버린 땅을 정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하는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것이 비가 내린 후의 남방 시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남방 시내와 같이, 완전히 죽어버린 말라빠진 땅에 하늘로부터 비가 오면 생명의 강이 되고 푸른 정원이 이뤄지듯이 나의 영혼, 우리의 영혼, 죄에 노예되고 포로가 되어 아무런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죽어 말라버린 우리의 상태에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 예수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전혀 새로운 존재,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은 넘실거리는 강물과 같고 푸른 초장과 같은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지 내가 눈물 흘리고 예수를 영접하던 그 때, 그 순간에만 필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은혜가 남방 시내와 같이 날마다 부어져 죽어 말라버린 나의 심령에 부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저 죽어 딱딱한 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라는 성전에 나아가며 불러야 할 노래가 바로 이 노래, 구원의 은혜를 구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노래여야 합니다.
마지막 5-6절입니다.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네게브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죽어버린 우리의 심령에서 무슨 열매가 나겠습니까? 아무런 열매도 기대할 수 없이 절망적이고 죽은 땅이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도 없고 온통 메마른 땅만 보이는데 거기에 누가 씨를 뿌리겠습니까? 이 절망의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이 남방 사막에 불과한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절망의 저주받은 땅인 우리의 영혼에 눈물을 흘리며 생명의 씨, 거룩한 씨를 뿌립니다. 예수라는 씨를 뿌립니다.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은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가 뿌리신 생명의 씨, 거룩한 예수라는 씨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메마르고 돌처럼 굳어있는 시내가 물로 가득한 강이 되며 정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을 완전히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 열매를 맺어버리는, 곡식단이 가득한 기쁨의 밭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한 번 구원 받았으니 그 다음은 우리가 구원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갚아야 한다는 값싼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구원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시는 예수가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황폐화된 네게브 사막과 같은 심령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지만 십자가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씨, 예수 자신을 뿌리신 예수께서는 결국 성도라는 기쁨의 곡식 단을 거두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도가 바라는 구원의 은혜이며 회복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구하시는 복된 교우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령을 구하오니 메마른 사막과 같이 딱딱하고 굳어져 아무런 생명을 낳지 못하는 절망적 인생들에게 날마다 십자가의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씨를 뿌리시고 열매를 맺어버리시는 예수의 은혜를 주옵소서. 남방 시내와 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거룩한 단비로 인하여 나의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로 넘쳐흐르기를 기대합니다. 오직 이것만 우리의 소원과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시126편은 128편까지 세 편의 시가 하나로 묶여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시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며 부른 노래라고 표제가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구원의 사건이 출애굽을 생각하든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생각하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생각하든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기쁨과 환희와 감사를 갖게 하는 성도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예배하러 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구원의 노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포로에서 구원해 주셨는가를 상기하며 찬양하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언제나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노래하며 늘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닌 어떤 사명감이나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성취감, 열심, 성과 같은 것이 우선이거나 먼저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큰 일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늘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나의 신앙을 삼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갈1:9-10절입니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의 은혜만 믿는 그 복음이 아닌 다른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아니 저주를 받아라,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열심이나 취향이 아니라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붙잡으면 저주이며 멸망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나 착한 것,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갈채를 받는 것도 자기의 죄고백에서 나오지 않고, 예수만 붙잡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면 저주를 받는 자기사랑에 불과합니다. 작금의 기독교 복음은 이것을 헷갈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인간의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주고 착하게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면 마치 그것이 복음이라고 혼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은 단지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환기키시고 더 착하고 희생하며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감동적인 이야기나 어떤 희생적인 영화나 음악도 얼마든지 습관을 바꾸고 결단도 하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있고 선행이나 도덕이나 휴먼 스토리에도 다 있는 것들입니다. 그게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지시키고 인정시키며 그래서 우리는 패역한 죄인이어서 절망뿐이고 우리가 살려면 오직 예수의 의를 붙잡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과 저주뿐임을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아무리 선하게 보여도 예수를 붙잡지 않는 것이면 그건 저주의 대상입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가 자꾸만 세상이 칭찬해 주는 착한 일 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착각을 하는 듯한데, 교회는 착한 일을 쫓아가는 곳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오직 예수만 붙들어야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절대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 복음이 세상에 대해 ‘너희는 죽은 자들이다, 너희가 예수를 붙잡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착한 일하고 최선으로 선행을 해도 그건 전부 죄다, 회개하고 예수만 믿어라’ 이렇게 사정없는 칼을 대는 것인데 어찌 교회가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요15:18-20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죄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고 교회에 다니지, 그런데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느냐? 맞습니다. 왜 자꾸 반복을 할까요? 그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구원이란 한 번에 받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신분의 구원이 있고(칭의) 그 다음에는 나의 실존이 예수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 수준의 구원(성화)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신분의 구원은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때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과거형이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성화의 구원, 수준의 구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현실입니다. 신분의 구원은 받았지만 수준의 구원에서는 여전히 죄에 패배하고 승리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실존인 현실에서도 자기의 노력과 선행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며 성화에서도 오직 예수를 붙들어 그 의를 덧입고 예수로만 완성이 되어감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126:4을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왜 ‘남방 시내와 같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까? 네게브, 그러니까 이스라엘 남방 지역의 시내들은 보통 때는 강이 아니라 길이며 그냥 평지입니다. 평소에는 전혀 시내인지 강인지를 알 수 없게 길로 쓰이는 지형입니다. 완전히 말라 버린 생명력이 없는 딱딱한 흙에 불과한 지형에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이 시내들은 갑자기 물길이 되어 말라버린 강바닥을 바꾸고 바짝 타버린 땅을 정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하는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것이 비가 내린 후의 남방 시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남방 시내와 같이, 완전히 죽어버린 말라빠진 땅에 하늘로부터 비가 오면 생명의 강이 되고 푸른 정원이 이뤄지듯이 나의 영혼, 우리의 영혼, 죄에 노예되고 포로가 되어 아무런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죽어 말라버린 우리의 상태에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 예수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전혀 새로운 존재,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은 넘실거리는 강물과 같고 푸른 초장과 같은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지 내가 눈물 흘리고 예수를 영접하던 그 때, 그 순간에만 필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은혜가 남방 시내와 같이 날마다 부어져 죽어 말라버린 나의 심령에 부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저 죽어 딱딱한 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라는 성전에 나아가며 불러야 할 노래가 바로 이 노래, 구원의 은혜를 구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노래여야 합니다.
마지막 5-6절입니다.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네게브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죽어버린 우리의 심령에서 무슨 열매가 나겠습니까? 아무런 열매도 기대할 수 없이 절망적이고 죽은 땅이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도 없고 온통 메마른 땅만 보이는데 거기에 누가 씨를 뿌리겠습니까? 이 절망의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이 남방 사막에 불과한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절망의 저주받은 땅인 우리의 영혼에 눈물을 흘리며 생명의 씨, 거룩한 씨를 뿌립니다. 예수라는 씨를 뿌립니다.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은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가 뿌리신 생명의 씨, 거룩한 예수라는 씨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메마르고 돌처럼 굳어있는 시내가 물로 가득한 강이 되며 정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을 완전히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 열매를 맺어버리는, 곡식단이 가득한 기쁨의 밭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한 번 구원 받았으니 그 다음은 우리가 구원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갚아야 한다는 값싼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구원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시는 예수가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황폐화된 네게브 사막과 같은 심령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지만 십자가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씨, 예수 자신을 뿌리신 예수께서는 결국 성도라는 기쁨의 곡식 단을 거두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도가 바라는 구원의 은혜이며 회복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구하시는 복된 교우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령을 구하오니 메마른 사막과 같이 딱딱하고 굳어져 아무런 생명을 낳지 못하는 절망적 인생들에게 날마다 십자가의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씨를 뿌리시고 열매를 맺어버리시는 예수의 은혜를 주옵소서. 남방 시내와 같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거룩한 단비로 인하여 나의 죽은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로 넘쳐흐르기를 기대합니다. 오직 이것만 우리의 소원과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를 들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영훈 목사님의 시편 4 (0) | 2013.11.18 |
---|---|
서영훈 목사님의 시편 3 (0) | 2013.11.18 |
서영훈 목사님의 시편 (0) | 2013.11.18 |
예수가 뚫고 들어온 사람/ 서영훈 (0) | 2013.11.18 |
서영훈- 시편 22편 (0) | 2013.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