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104:1-35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오늘 이 시편 104편의 저자가 가지는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연유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며, 하나님이 주고,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이 만물이며 인생이랍니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명확하며 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스스로 취하시는 기쁨과 만족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만족하시며 스스로 완전하셔서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우리 신자가 생각하는 오해가 하나 있는데, 우리의 행위나 도덕이나 선행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며 그것으로 마치 세상이 변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그럴 필요도 없이 만물과 만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끄시며 완성하시고 소멸시키시고 또한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마치 내가 하나님께 도움이 되며, 내가 선행을 하거나 도덕적인 일이나 구제나 봉사를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도움을 받아 세상이 그 만큼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세상이 변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구원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시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망적인 인생들, 소망이 없는 시체들, 흙에 불과한 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거룩하게 만들어내셔서 구원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내시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7-29절을 보겠습니다.
27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dust)로 돌아가나이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창조물들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주시면 받고 거두시면 빼앗깁니다. 생명을 주시기에 기동하며 살고, 호흡을 거두시면 우리는 먼지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처분을 받는 자들입니다. 마13:10-12입니다.
마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천국의 비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못 받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깨닫고 아닌 자는 영원히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철저히 갈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을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구걸하시지 않습니다. 타협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만 받을 것이요 주지 않으시는 자는 받지 못하고 계속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인간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18:27입니다.
창19: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dust)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신이 티끌, 즉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이 티끌이라고 번역된 ‘야파르’는 여러 곳에서 흙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성령)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야파르’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은 ‘dust’ 곧 먼지라고 번역했습니다. 먼지는 무엇이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가치한 존재, 곧 nothing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 그렇게 nothing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 즉 성령을 부어주셔서 살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입니까? 아담의 죄입니다. 바로 이 흙의 자리, 먼지의 자리를 망각하고 자기가 인생의 주도권을 잡는 자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창3:4-5절입니다.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흙의 자리, 먼지의 자리, 죽은 자의 자리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은 자신에게 인생의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흙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그 자체가 되입니다. 흙이며 먼지이며 죽은 자라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기를 챙기고 자기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흙이며 먼지이고 죽은 자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거두시면 죽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임을 늘 마음에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자가 아니며, 하나님을 돕는 자도 아니며, 가치가 없는 자,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기독교란, 더 많이 가지게 해 주고, 더 견고하게 지탱시켜 주고, 세상에서 더욱 나를 강화시키는 자리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엔 단지 세상 욕망의 형태만 있지 않고 종교적 형태를 가진 착한 행실이나 종교적 열심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선행을 하고 종교 예식을 잘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자격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과 같이 누구를 도울 수 있고,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매일 주님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을 생산할 아무 능력이 없다고 부인되는 것이며, 나는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무능력자임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예수로 채워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인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요12:24-25절입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나의 옛자아와 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세상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기도하고, 나를 더 강화시키려고 예수를 이용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녀가 잘 되고, 남편 아내가 잘 되는 것도 전부 나를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가족은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나를 위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없습니다. 분명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부 내가 살아있고 나를 더 견고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착각을 합니다.
나는 흙이니 흙으로 내려가겠다고, 나는 예수에게 굴복되겠다고, 나는 얼마든지 자존심이 상하고, 세상에서 망해도 좋으니 내 자아와 내 고집과 내 욕심과 내 아담의 본성은 죽고 오직 예수만 내 안에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34절입니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인지를 자각하는 자는 참으로 여호와로만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고백하고 나의 흙됨을 자각하는 자는 오직 예수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도 예수로만 만족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아직도 내 안에 제거되지 않은 아담의 본성,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죄악, 옛자아가 남은 것입니다.
결론이 35절입니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왜 갑자기 죄인과 악인의 이야기입니까? 자신의 죽은 자됨, 흙됨, 죽은 핏덩이 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성취하려는 자는 이 땅에서 결단코 소멸되고 맙니다.
참된 성도란, 나는 죽은 자다, 예수가 오늘도 나를 살린다, 나의 욕망과 힘은 모두 예수 십자가 안에 죽었다, 이것을 깨닫고 선언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매일 복음으로 죽는 자만이 부활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시는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의 아버지, 우리의 실존은 뭘 더 가지려고, 더 성공하고, 더 움켜쥐려고 하는 패역함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먼지이며 죽은 흙이며 시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야만 우리는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를 통해 자존심을 세우고, 하나님을 통해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죽는 것입니다. 세상적 자아가 죽임을 당하고 오직 예수로만 만족하고 예수만 소망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 거지가 되어 주님의 도우심을 그저 기다리는 복된 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오늘 이 시편 104편의 저자가 가지는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연유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며, 하나님이 주고,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이 만물이며 인생이랍니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명확하며 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스스로 취하시는 기쁨과 만족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만족하시며 스스로 완전하셔서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우리 신자가 생각하는 오해가 하나 있는데, 우리의 행위나 도덕이나 선행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며 그것으로 마치 세상이 변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그럴 필요도 없이 만물과 만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끄시며 완성하시고 소멸시키시고 또한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마치 내가 하나님께 도움이 되며, 내가 선행을 하거나 도덕적인 일이나 구제나 봉사를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도움을 받아 세상이 그 만큼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세상이 변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구원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시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망적인 인생들, 소망이 없는 시체들, 흙에 불과한 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거룩하게 만들어내셔서 구원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내시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27-29절을 보겠습니다.
27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dust)로 돌아가나이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창조물들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주시면 받고 거두시면 빼앗깁니다. 생명을 주시기에 기동하며 살고, 호흡을 거두시면 우리는 먼지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처분을 받는 자들입니다. 마13:10-12입니다.
마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천국의 비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못 받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깨닫고 아닌 자는 영원히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철저히 갈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을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구걸하시지 않습니다. 타협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만 받을 것이요 주지 않으시는 자는 받지 못하고 계속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인간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18:27입니다.
창19: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dust)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자신이 티끌, 즉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이 티끌이라고 번역된 ‘야파르’는 여러 곳에서 흙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성령)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야파르’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은 ‘dust’ 곧 먼지라고 번역했습니다. 먼지는 무엇이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가치한 존재, 곧 nothing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 그렇게 nothing에 불과한데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 즉 성령을 부어주셔서 살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입니까? 아담의 죄입니다. 바로 이 흙의 자리, 먼지의 자리를 망각하고 자기가 인생의 주도권을 잡는 자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창3:4-5절입니다.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흙의 자리, 먼지의 자리, 죽은 자의 자리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은 자신에게 인생의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입니다. 흙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그 자체가 되입니다. 흙이며 먼지이며 죽은 자라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기를 챙기고 자기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흙이며 먼지이고 죽은 자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거두시면 죽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임을 늘 마음에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자가 아니며, 하나님을 돕는 자도 아니며, 가치가 없는 자,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기독교란, 더 많이 가지게 해 주고, 더 견고하게 지탱시켜 주고, 세상에서 더욱 나를 강화시키는 자리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엔 단지 세상 욕망의 형태만 있지 않고 종교적 형태를 가진 착한 행실이나 종교적 열심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선행을 하고 종교 예식을 잘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자격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과 같이 누구를 도울 수 있고,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매일 주님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나는 거룩을 생산할 아무 능력이 없다고 부인되는 것이며, 나는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무능력자임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예수로 채워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인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요12:24-25절입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나의 옛자아와 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세상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기도하고, 나를 더 강화시키려고 예수를 이용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녀가 잘 되고, 남편 아내가 잘 되는 것도 전부 나를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가족은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나를 위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없습니다. 분명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부 내가 살아있고 나를 더 견고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착각을 합니다.
나는 흙이니 흙으로 내려가겠다고, 나는 예수에게 굴복되겠다고, 나는 얼마든지 자존심이 상하고, 세상에서 망해도 좋으니 내 자아와 내 고집과 내 욕심과 내 아담의 본성은 죽고 오직 예수만 내 안에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34절입니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인지를 자각하는 자는 참으로 여호와로만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고백하고 나의 흙됨을 자각하는 자는 오직 예수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도 예수로만 만족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아직도 내 안에 제거되지 않은 아담의 본성,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죄악, 옛자아가 남은 것입니다.
결론이 35절입니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왜 갑자기 죄인과 악인의 이야기입니까? 자신의 죽은 자됨, 흙됨, 죽은 핏덩이 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성취하려는 자는 이 땅에서 결단코 소멸되고 맙니다.
참된 성도란, 나는 죽은 자다, 예수가 오늘도 나를 살린다, 나의 욕망과 힘은 모두 예수 십자가 안에 죽었다, 이것을 깨닫고 선언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매일 복음으로 죽는 자만이 부활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시는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의 아버지, 우리의 실존은 뭘 더 가지려고, 더 성공하고, 더 움켜쥐려고 하는 패역함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먼지이며 죽은 흙이며 시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야만 우리는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를 통해 자존심을 세우고, 하나님을 통해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죽는 것입니다. 세상적 자아가 죽임을 당하고 오직 예수로만 만족하고 예수만 소망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 거지가 되어 주님의 도우심을 그저 기다리는 복된 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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