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시78편은 이 시를 쓴 기자가 자신들의 조상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구제불능이며 패역하며 악질인지를 폭로시키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안 된다. 우리는 도무지 소망이 없다.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을 조상들의 예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었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피겠습니다. 13-17절입니다.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22절입니다.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32절입니다. “32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늘의 본문도 살피겠습니다. 40-42절입니다.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56-58절입니다.
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저들을 압제에서 구해내시고,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를 비같이 내리시며, 고기와 새를 바다의 모래같이 내리셔서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헛일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여전히 범죄하며 여전히 패역하며 여전히 배반하며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며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반복되는 결론입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잘 믿겠습니까? 아닙니다. 기적과 이사를 베푸사 현재의 염려와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면 잘 믿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저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는 주의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같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항하고 미워하고 고집스럽습니다. 더 나쁩니다. 알지만 배신합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우리 신자들입니다.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몇 가지 종교적 행위만 할 뿐이지 세상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일에만 경건한 흉내를 낼 뿐이지 뭐가 다릅니까? 전부 죄 뿐입니다. 죄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죄인이기에 선을 흉내만 내고 의를 따라 하기는 하지만 죄로 결실할 뿐입니다. 죄인이 하는 일은 전부 죄일 뿐이라는 것이 산상수훈이 말하는 바입니다.
단지 구약의 문제일까요? 요12:37을 보겠습니다.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한복음 1-12장까지의 예수님의 공적가르침과 행함의 결론은 이토록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보여주고 기적과 이사를 행하여도,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하셨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금방 돌아섭니다. 금방 돌아서고 잊어버리고 무시하고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것이 바로 인생들입니다. 가망이 없고 완전히 패역하며 선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요12:47을 보겠습니다.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분명히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지켜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십니다. 기대도 하지 않으십니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예수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주님의 말을 지켜서 자격을 취득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너를 구원해 내는 것이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내가 해낸다. 사람은 나를 배신하고 미워하고 배은망덕하고 오히려 잊어버리고 고집을 부리고 반항을 하지만 구원은 나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수록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근사해 지는 것도 아니고 착해지거나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더 의지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아니라고요? 그건 가짜입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고 나 자신을 더 밝히 알수록 내가 예수를 이렇게 믿었는데도 요모양 요꼴이라는 것을 더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요14:6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강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잘 보시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야만 갈 수 있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예수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적도, 이사도, 자기의 노력도 애씀도, 선행도, 구제도, 선교도, 헌금도, 최선을 다하는 예배도, 새벽기도도, 그 어느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인간 내부에 있는 어떤 원인도 선을 창조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고 100%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속사람을 완전히 재창조해 내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바꾸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서 고쳐내셔야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68-69절입니다.
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68절의 유다지파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유다지파에서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69절의 성소도 역시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제불능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이 손수,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히10: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소의 휘장, 즉 성소는 예수이며 그 성소에 들어갈 때 죄사함을 위해 드리는 제물의 피도 역시 예수의 피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산 제물이 되어 자신의 피를, 제사를 위한 피로 내놓으셨고, 또한 성소 휘장인 자신의 육체를 찢어(위로부터 하나님이 찢으심) 우리에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살 길을 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려도 안 되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구원의 길을, 몸소, 자원하여, 주도적으로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인도 되고 생명을 소유하고 숨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겉으로는, 외적으로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여전히 죄를 짓고 여전히 저항하며 여전히 배반하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고쳐내시는 은혜, 살려내시는 은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물로 드려 죄인을 소생케 하시는 놀라운 은혜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계셔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지금 그 일을 해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하나님께 선행을 만들어 자격을 얻으려는 자기 노력의 오늘이 아니라, 살려냄을 받았어도 여전히 죄짓고 반항하고 내 욕심만 채우는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찢으신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오늘입니다. 나의 저항을 때려서라도 설득해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오늘도 거룩을 흉내만 내지 실체가 없고, 남을 비교하여 잘난 체를 하는 것으로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리를, 진리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형식만으로 자기의를 삼아 하나님도 우습게 여기는 우리를, 우리의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용서와 은혜로 대해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었어도, 아니 주께서 내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러주셨지만 그 은혜와 기적을 금방 잊어버리고 배반하고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기만 한 오늘입니다. 언제 주님과 교제하고, 언제 주님의 말씀, 진리에 가슴 뛰고 감격하며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까? 오직 우리의 신앙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에 혈안이고 내 일을 도와주는 용병에 불과한 존재로 하나님을 전락시켰습니다. 헌금을 바치니 내 대소사를 책임져야 하고, 봉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은 공짜가 아님을 기억하라고 주님을 윽박지르기 일수입니다. 거룩을 가장한 기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언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겠으며 언제 우리가 주님만으로 만족한 자녀가 되겠습니까? 주여, 이 먼지 같은 인생을 구원해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주님만 높임을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78편은 이 시를 쓴 기자가 자신들의 조상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구제불능이며 패역하며 악질인지를 폭로시키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안 된다. 우리는 도무지 소망이 없다.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을 조상들의 예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었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피겠습니다. 13-17절입니다.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22절입니다.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32절입니다. “32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늘의 본문도 살피겠습니다. 40-42절입니다.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56-58절입니다.
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저들을 압제에서 구해내시고,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를 비같이 내리시며, 고기와 새를 바다의 모래같이 내리셔서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헛일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여전히 범죄하며 여전히 패역하며 여전히 배반하며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며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반복되는 결론입니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잘 믿겠습니까? 아닙니다. 기적과 이사를 베푸사 현재의 염려와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면 잘 믿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저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는 주의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같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항하고 미워하고 고집스럽습니다. 더 나쁩니다. 알지만 배신합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우리 신자들입니다.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몇 가지 종교적 행위만 할 뿐이지 세상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일에만 경건한 흉내를 낼 뿐이지 뭐가 다릅니까? 전부 죄 뿐입니다. 죄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죄인이기에 선을 흉내만 내고 의를 따라 하기는 하지만 죄로 결실할 뿐입니다. 죄인이 하는 일은 전부 죄일 뿐이라는 것이 산상수훈이 말하는 바입니다.
단지 구약의 문제일까요? 요12:37을 보겠습니다.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한복음 1-12장까지의 예수님의 공적가르침과 행함의 결론은 이토록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보여주고 기적과 이사를 행하여도,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하셨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금방 돌아섭니다. 금방 돌아서고 잊어버리고 무시하고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것이 바로 인생들입니다. 가망이 없고 완전히 패역하며 선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요12:47을 보겠습니다.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분명히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지켜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십니다. 기대도 하지 않으십니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예수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주님의 말을 지켜서 자격을 취득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너를 구원해 내는 것이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내가 해낸다. 사람은 나를 배신하고 미워하고 배은망덕하고 오히려 잊어버리고 고집을 부리고 반항을 하지만 구원은 나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수록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근사해 지는 것도 아니고 착해지거나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더 의지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아니라고요? 그건 가짜입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고 나 자신을 더 밝히 알수록 내가 예수를 이렇게 믿었는데도 요모양 요꼴이라는 것을 더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요14:6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강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잘 보시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야만 갈 수 있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예수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적도, 이사도, 자기의 노력도 애씀도, 선행도, 구제도, 선교도, 헌금도, 최선을 다하는 예배도, 새벽기도도, 그 어느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인간 내부에 있는 어떤 원인도 선을 창조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고 100%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속사람을 완전히 재창조해 내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바꾸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서 고쳐내셔야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68-69절입니다.
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68절의 유다지파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유다지파에서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69절의 성소도 역시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제불능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이 손수,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히10: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소의 휘장, 즉 성소는 예수이며 그 성소에 들어갈 때 죄사함을 위해 드리는 제물의 피도 역시 예수의 피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산 제물이 되어 자신의 피를, 제사를 위한 피로 내놓으셨고, 또한 성소 휘장인 자신의 육체를 찢어(위로부터 하나님이 찢으심) 우리에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살 길을 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려도 안 되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구원의 길을, 몸소, 자원하여, 주도적으로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인도 되고 생명을 소유하고 숨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겉으로는, 외적으로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여전히 죄를 짓고 여전히 저항하며 여전히 배반하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고쳐내시는 은혜, 살려내시는 은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물로 드려 죄인을 소생케 하시는 놀라운 은혜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계셔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지금 그 일을 해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하나님께 선행을 만들어 자격을 얻으려는 자기 노력의 오늘이 아니라, 살려냄을 받았어도 여전히 죄짓고 반항하고 내 욕심만 채우는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찢으신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오늘입니다. 나의 저항을 때려서라도 설득해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오늘도 거룩을 흉내만 내지 실체가 없고, 남을 비교하여 잘난 체를 하는 것으로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리를, 진리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형식만으로 자기의를 삼아 하나님도 우습게 여기는 우리를, 우리의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용서와 은혜로 대해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었어도, 아니 주께서 내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러주셨지만 그 은혜와 기적을 금방 잊어버리고 배반하고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기만 한 오늘입니다. 언제 주님과 교제하고, 언제 주님의 말씀, 진리에 가슴 뛰고 감격하며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까? 오직 우리의 신앙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에 혈안이고 내 일을 도와주는 용병에 불과한 존재로 하나님을 전락시켰습니다. 헌금을 바치니 내 대소사를 책임져야 하고, 봉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은 공짜가 아님을 기억하라고 주님을 윽박지르기 일수입니다. 거룩을 가장한 기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언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겠으며 언제 우리가 주님만으로 만족한 자녀가 되겠습니까? 주여, 이 먼지 같은 인생을 구원해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주님만 높임을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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