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인 시편 22편은 시편23편 앞에 나옵니다. 시편23편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다니지 않는 사람이든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아마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는 내용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편 23편 앞에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내용인 시편
22편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신자 중에서도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은 대부분 이 땅에서의 번영과 행복과 위로와 평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평안이 있다면,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면, 우리에게 건강이 있다면, 우리에게 풍성함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그것이 왜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을 단순히 감사하며 누리기에 급급하기에 시편 22편은 우리의 관심에서 감추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시편22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11절까지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12절부터 21절까지로 고통 받는 내용을 설명하며 도움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세 번째 부분은 22절부터
31절까지로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내용입니다.
시편 22편이 갖는 중요한 의미 하나는 제5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일치되는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6절부터 8절까지는 군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17절과18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31절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 이 시편22편의 성경 기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시편22편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는 느낌을 먼저
묘사합니다.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고통을 외면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조롱까지도 합니다.
‘니가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 신뢰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널 구해 주시겠지’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인간은 세상의 경쟁에서 실패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이것은 인간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죄성입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해서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연약한 부분이나, 잘못이 발견되면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집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정말 정의로운 것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짐으로써
‘나는 돌 맞는 저들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군중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어이. 너 사흘만에 성전을 짓는다며? 남은 구원한다고 하면서 너는 구원 못하냐? 십자가에서 내려와봐.’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흘만에 성전을 짓는 다는 말의 진실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보는 것은 이 세상의 힘에 밀려서 패배하고 좌절하고 실패해서 십자가에 달린 연약한 한
인간을 볼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아무리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욕하더라도 항거할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나도 때립니다. 나도 침
뱉습니다. 나도 조롱합니다. 그것으로 ‘나는 잘났다’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것이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한 짓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자의 연약함이나 실패나 패배가 드러나면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나는 너보다 나은 인간이다’ 라고 외치는 인간의 교만과 악함을 봅니다. 말로는
‘벌레 보다 못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라고 합니다. 그러나, 약한 이를 짓밟고 실패하고 좌절된 이를 정죄하고 자신과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교만과 악함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 우리라면 지금 오늘 서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면 이스라엘 군중과
같이 동일하게 조롱하고 멸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민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틀렸다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를 내려 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주시지 않으면 이 인간의 죄성과 악함이 해결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 십자가에서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두 번째 부분에서는 어떻게 시편 기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피가 물 같이 쏟아지고 뼈가 어그러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한 고통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멀리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를 속히 도와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극심한 영적인 고통과 실제적인 육체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은 상상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고통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런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실속에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고통이 우리의 인생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성도들이 인생속에서 당하는 고통은 자신을
최면시킨다고 없어지는 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영혼과 육체로 고통을 처절히 느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인생에게 직면하게 되는
고통 또한 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실체로서 우리 영혼과 육체에 고통은 파고들게 됩니다. 시편
22편 기자 또한 그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2절부터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22절부터는 시편 22편 세 번째 단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갑자기 이 고통당하던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우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통중에 신음하다가 갑자기 왜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물리치시고 고통을 제거해 주셔야 이런 찬송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없어지고 어려움이 해결되어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해답은 24절 이후에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그는 고통가운데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닌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단 한 순간도 얼굴을 돌리시지 않았던 것을 안 것입니다. 그가 고통중에 내는 작은
신음하나까지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셨던 것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목적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것이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승리를 막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이루어 낼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셨던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이겨내셨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서 하실 일을 알았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 엄청난 고통의 사건과 순간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이나 연약함으로 인해 찾아올 수도 있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유없이 고통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금방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시편23편만을 알기에 해결되지 않는 고난의 시편22편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고 무관심하고 하나님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그런 암흑과 같은
순간이 종종 다가옵니다. 인생의 여정에 햇볕만 나는 순간이 있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면 그 아이들은 폭풍이 불거나 폭우가 내리는 날씨에는 주저
앉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시편 22편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푸른 초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는 곳에서 만나는 폭풍과 추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런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면 제일 먼저 도와줄 사람이나 해결할 힘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무시하고 조롱해서 나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신앙을 가졌으니 하나님께서 내
어려움을 도와주시거나 해결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내 어려움의 현장과 고통의 현장에 등장시켜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그러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이웃의 삶에도 그러한 순간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든지 연약해서든지 그 이유와 원인에 상관없이 단 한 순간도 그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의 고통과 신음을 하나님께서는 모른 척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것이라면 시편 22편과 같은 신앙고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조롱과 괴롭힘이 나를 둘러싸거나 죽음이 우리를 위협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단순히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고통과 고난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사람의 조롱이나 죽음조차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시편 22편 기자는 그 고통의 순간에 그런 하나님을 얼굴을 발견했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서 그런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그리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편22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 신앙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고통을 만났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해야만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 고통이나 실패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고통과
고난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해 주시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힘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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