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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서영훈 목사님의 시편 5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3. 11. 18.

본문: 시편64편 1-10절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주)

시편64편은 개인적인 고통에서 건짐을 구하는 시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라고 표제가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인물입니다.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민족의 영웅이 되었으며 후에는 왕위에 등극하였고 수 많은 시를 남기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토록 많은 고통과 한숨의 시를 썼습니다. 그의 시를 보면 너무나 많은 환란과 눈물과 죽음의 위협과 원수들의 조롱과 칼날과 올무와 밤을 지새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하나님께 호평을 받은 다윗인데 어찌 그의 인생은 이토록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던 것입니까? 신자의 삶은 그 자체가 이 땅에서는 고난입니다. 세상을 거스르고 살 수 밖에 없고 세상과 선을 긋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신자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치이는 것이고 힘든 것이고 피곤한 것입니다.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하느니라.

또한 죄된 세상을 보며 인내하고 살아야 하는 것, 그 죄된 세상의 원리와 가치가 자기 속에 동일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보며 사는 자체가 바로 고난이며 눈물입니다

롬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기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이 땅에서 가지는 복이 아닙니다. 소속이 다르고 주인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이 땅에서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편안하거나 원하는 소원이 전부 이뤄지거나 남들이 우러러 보는 환경과 가문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잘나고 편안한 곳으로 데려가는 데에 목적을 두시지 않습니다.

신8:2-3입니다.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에 그들이 광야의 길을 걸은 사건에 대한 평가입니다. 광야길의 의미는 너를 낮추시고 너를 훈련하여 너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마음이 있는지를 알고자 하심이며 또한 만나를 주신 것도 오직 하나님으로 사는 것임을 알려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난의 길을 걷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인생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유리방황하며 걸인과 같은 삶을 살도록 하신 이유는 바로 그를 낮추시고 그를 훈련하시사 오직 인생이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그분의 말씀으로만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좀 편안해야 한다고 우깁니다. 먹고 살만 하고 외적인 조건이 채워져야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니랍니다. 우리는 형편이 좋아지고 여유가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신앙생활 잘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할을 잘 하면 나는 문제가 없는데 확실하게 안 주니까 내가 요것 밖에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목적지에 이르는 것은 오직 만나 하나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신령한 목적지가 아니고 부유함이고 성공이고 높은 곳이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는 가나안에 못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가는데 만나면 족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하다는 그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는 광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애굽을 탈출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광야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산다는 고백을 하는 수준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한숨과 눈물의 연속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목적하고 세상을 위해 살기 때문에 부족하고 하나님이 제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늘 불평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고통입니다.

오직 닥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조건을 높이기 위해서만 예수를 미신이나 부적처럼 믿고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늘 그 수준이고 기쁨과 만족이 없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갖는 충만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시64:10절입니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고통과 눈물과 한숨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고 이 노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0 The righteous man will be glad in the LORD and will take refuge in Him; And all the upright in heart will glory)

세상이 목적이 아닌 구원받은 인생이라면 결단코 세상의 일로 인해 낙담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살려내지 못하고 세상이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여호와로 말미암아서만 즐거워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목적으로 살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고통과 근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적으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것이 아무런 부족함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성경밖에 없다는 불평에서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는 세상을 믿고, 예수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으로 사는 인생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뭘 주니까 즐거워한다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인지 예수를 빙자한 세상을 믿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새겨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예수를 믿어 세상으로부터 차별되고 더 세련되고 더 성공의 삶을 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닐 것입니다. 진짜 수렁에서 건져진 자라는 분명한 구원에 대한 자각이 있다면 예수를 빙자하여 세상의 복을 구하고 더 잘나고 더 많이 소유하여 자기를 자랑하려는 마음은 갖지 못할텐데 이 세대는 세상보다 더 욕망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도 복음이며 성경이며 교회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위선자이며 외식하는 자임을 솔직하게 직면할 때 최소한 남을 손가락질하는 바리새인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반성에서 시작하여 자기부인으로 끝나는 자기죽음과 부활의 종교입니다. 남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책임과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핑계하지 않고 충성되게 지는 모든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