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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100주년 교회 강주훈 목사님 말씀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3. 12. 12.

                요즘 새벽마다 전도서를 듣고 있다. 라이브의 생동감이 좋다^^ 오늘은 특히 강주훈 목사님의 말씀이 나에게 와 닿는다...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전도서 7장을 살펴보면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조하면서 지혜와 어리석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조하는 것이 두서없이 서술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두서없이 쓰여진 경구가 아니라 어떤 큰 숲 속에서 조밀하게 자라난 나무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풀어가는 실마리는 전도서 7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8절을 제가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얻지 못하였지만, 다만 찾으면서 깨달은 것은 오로지, 천 명 가운데서 남자 하나는 찾을 수 있어도, 천 명 가운데서 여자 하나는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 명 가운데 남자 한명을 찾을 수 있고, 천 명 가운데 여자 하나는 찾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거니와 남자가 여자보다 지혜롭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여자 말을 들으면 집안이 평안하다. 여자말을 들어서 손해볼 것이 없다. 이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아울러 19절에 나오는 열 명의 권력자들에서 열 명이 숫자 열 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천 명의 여자중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에서 참된 지혜로운 인간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 명 중에 찾은 한 명의 남자는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골로새서 2장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역사속에 존재한 인간 중에 유일하게 완전한 지혜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서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참된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확실하게 설명하는 것이 29절 말씀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과 하나님을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정직과 지혜의 원천이며,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참된 지혜와 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1절부터 10절까지는 죽음과 삶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는 좋은 이름, 초상집, 슬픔, 책망, 일의 끝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좋은 기름, 웃음, 혼인집, 탐욕, 시작, 급한 마음 등을 이야기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좋은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출생과 함께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악에 노출되게 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좋은 기름, 웃음, 혼인집, 탐욕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죄악은 너무도 강력한 힘을 가져서 7절 말씀을 보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명철을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고 변질시키기 위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죄악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5절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채찍질을 당해야만 합니다. 그런 싸움이 언제 끝이 납니까? 죽음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태어나는 날보다 좋은 것이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든 몇 일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이 고통스럽고 그 싸움이 힘든 사람은 참된 안식인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 날을 소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죽는 날이 낫다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논리와는 정반대되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정말 살기 싫다’ 라고 말할 때는 어떤 때입니까?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세상에는 잔칫집, 웃음, 혼인집, 웃음 소리 이런 것들이 존재하기에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 힘들어 죽고 싶다’ 고 말할 때는 내 삶에 잔치가 없고, 혼인함의 즐거움이 없고, 웃을 일이 없을 때 즉, 세상적인 쾌락이 없어질 때 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그런 세상적인 쾌락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니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가장 염증을 느끼는 순간은 세상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세상의 것을 가짐으로써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이 이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농담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 아무리 공부잘해도 이쁜 사람 못 당한다.
2. 아무리 이뻐도 팔자 좋은 사람 못 당한다.
3. 아무리 팔자 좋아도 젊은 사람 못 당한다.

이 말은 젊음을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말일 것입니다. 나이든 여자 연예인들은 카메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젊고 이뻤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늙고 이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10절 말씀은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난 세월을 오직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면 그것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남는 것은 허무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좋았는데’ 라는 푸념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우리의 인생 동안 하루 하루를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해 왔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의 머리빠짐을 우리의 흰머리남을 우리의 늘어나는 주름살을 결코 젊음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월들은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한 고통스럽고 처절한 싸움의 나날들이었고 하루 하루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가치로운 나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힘든 여정을 마치고 일을 끝낼 때가 다가 왔는데 왜 이 세월을 지난 날과 바꾸겠습니까?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루 하루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버틸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우리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는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잘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13절과 14절 말씀처럼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확신하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15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선뜻 이해가 잘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주제는 일관되게 한 주제입니다. 15절 이하는 이제껏 전도서 기자가 삶과 죽음을 가지고 인생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은 자기의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다, 존경할 만하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이다. 정말 저 사람은 존경할 만하다.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해를 끼치지 않고 주위 사람을 잘 배려하는 이런 인생, 이런 삶이 멸망하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 악당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봅니다. 수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거나 가정들을 파멸로 이끈 정치가가 호의호식 합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니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그런 현상이 이 땅에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와 지혜는 철저히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 기자는 그런 삶을 살아라 하지 않고 18절 말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 관점에서의 의인이나 이 세상관점에서 악당이나 동일하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죄를 범하고 자기를 대적하는 존재를 저주하는 악당들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고 해서 사람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거나 저주하는 기도문을 써서 매일 외워야 저주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와, 자신의 자랑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부끄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주입니다. 인간이 자기들끼리 평가할 때는 더 의롭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인생 또한 악인과 같은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삶이나 이 세상에서 의로워 보이는 삶이나 전부 우리가 권고할 만한 삶의 모양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의 삶처럼 보이는 삶 또한 다른 이들을 저주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20절부터 설명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자 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의롭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시선,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평판에 집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행동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동일한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20절부터 22절 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낱낱이 드러냅니다. 인간이 그렇게 악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죄악된 인간의 삶의 본질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참된 지혜요,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모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악에서 벗어나 회복된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예수를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개를 이리 돌려도 죄악이고, 고개를 저리 돌려도 죄악이고, 누워도 죄악, 앉아도 죄악, 서도 죄악인 우리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죄악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싸움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코끝에서 숨이 멈추어야만이 그 싸움은 끝이 나고 진정한 안식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내어야만 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때로는 그 싸움에서 무너지고 패배할지라도 우리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