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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서영훈 목사님의 오늘의 새벽묵상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1. 20.

 

새벽에 교회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백주년 새벽묵상의 자리로 가게 되었다. 좋은 점도 많다. 새벽 5시부터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늑하고 고요한 방에서 날마다 다른 목사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으며 기쁨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오늘은 더더구나 서영훈 목사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았다. 예번 <비판>이라는 제목의 수요예배 말씀을 서너번 거푸 들으면서 은혜받았던 기억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오늘 말씀도 딱 그 말씀이다!! 덕택에 다른 날보다 갑절은 행복한 아침을 맞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얌전하게 조용하게 긁어왔다^^

많은 목사님이 계시지만 사람에게는 성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쏠림 현상이 있는 거 같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의 갈증과 나의 의문과 더불어 나의 절망을 단번에 깨뜨려주신 몇 분의 목사님을 격렬하게 사랑하는 아침이다 하하하

오늘 계속 리핏하면서 다시 새롭게 말씀 위에 서야징~~

본문 마7:1-12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서영훈 목사님의 새벽묵상

얼마 전 전국의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수학능력평가가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수험생들의 편의를 위해 배려를 하고 수송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올해도 성적표가 나오면 전국의 학생들 중에서 내가 백분위 몇 퍼센트에 해당되는지를 알게 되고 전국적인 순위가 매겨지게 될 것이며 그것으로 나에게 맞는 대학이 결정될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더 나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초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부모와 수험생은 그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힘을 들이고 애를 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경쟁 구조 속에서 더 나은 자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남을 밟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을 성공이며 행복이며 만족이라고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으로 태어납니다. 오늘 1절에 등장하는 비판이란 단지 남을 험담하고 뒤에서 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쟁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남을 밟고 내가 이기고 높이 오르려는 모든 인간의 본성과 욕망의 실체를 비판이라는 말로 정의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비판해야 합니까? 자기의 정당함과 의로움과 자격을 자기 힘과 자기 행위로 획득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과 열심, 즉 자기 행위로 자격을 만들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자존심을 버리기 싫어하는 인간들은 오로지 외모와 행위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움이란 예수가 내미시는 은혜의 손길을 면목 없이 붙드는 것이지 내가 나의 힘과 노력으로 선한 행위를 쌓아 만드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위와 노력,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인간적 힘이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고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주셨다면, 나는 자격 없는 자임을 인정하면서 면목 없이 예수의 은혜만을 덥석 붙드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나의 자격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행위로 얻으려는, 나의 의를 의지하려는 자랑을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의만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입니다.

막7:25-30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자기 딸의 귀신들림을 고쳐달라는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여인의 간청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개취급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개와 같은 인생에게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개와 같은 자, 부정한 자, 무능력한 자, 나의 힘으로는 어떤 의로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력자임을 인정하고, 나는 자녀의 떡은 고사하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신다면 그것조차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인데 그것도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행위와 노력으로 만들어 낸 의를 자기 자격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의가 아니라 ‘난 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라도 주신다면 그 은혜를 면목 없이 붙듭니다’ 이런 자가 바로 의로운 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씀이 나오는 전문맥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막7:17-20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대표적으로 음식을 말씀하심) 사람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속에서 곧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행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행위는 전부 악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의로움이란 인간이 아무리 순수한 동기와 열심을 동원했다고 해도 인간의 행위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가 덮어질 때 자격 없이 받아들이는 것, 성경은 그걸 선이라고 합니다. 내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기의 힘과 자격을 붙드는 거짓 의를 내려놓고 예수만 붙드는 선을 추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결국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자기 노력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붙드는 자는 자기 행위의 무가치함과 자기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너진 자입니다. 이미 자기의 선행으로 만드는 자격을 추구하는 자체가 무의미 하고 오히려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임을 깨달은 자입니다.

그런 성도가 어찌 행위로 남을 비판하여 너는 게을러서 안 되고, 부정해서 안 되고, 모자라서 안 되고 하는 식으로 비판하고 평가하여 ‘그래서 너는 하나님 앞에 낙제야, 인정받지 못해’ 이런 식으로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자기를 개로 여기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는 고백이 있는 자가 어찌 타인의 행위와 열심과 도덕과 노력의 여하에 따라 판단하여 점수를 매기고 그보다 더 나은 자가 되기 위해 남을 밟고 죽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여기서 6절이 이어집니다.
막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이란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 죄를 해결해 주신 상태입니다. 그 예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들이는 상태가 거룩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에게 전가된 의로운 상태입니다. 우리가 나의 행위나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행위를 좋아하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하려는 자들은 개처럼 은혜를 물어 뜯어버립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아무 자격 없이 부끄럽게 붙들면 되는데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은 그 은혜만 붙들어야 한다는 복음이 싫어서, 자기의 판단과 노력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기부인이라는 기독교 진리에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오히려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행위를 붙들어 버립니다.

돼지는 진주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돼지는 부정함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자기 행위로 만든 인간의 의를 붙드는 자는 결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을 붙드는 자는 부정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의 의를 붙드는 자, 그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만 의롭게 됩니다. 자기 의를 신뢰하고 자기의 선행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진주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 행위의 가치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추구를 부정당하고 예수만 붙들도록 끌려가는 신자의 참으로 복된 모습은 세상의 힘과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겐 멍청하고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열심히 살지 않는 것처럼, 노력하지도 않고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은혜만을 면목 없이 붙드는 것만이 선이며 거룩이며 신자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반응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힘으로 거룩과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해 버립니다. 자기 의를 쫓으며 자기의 힘과 노력을 붙잡는 자들은 그것이 자기가 자격 조건을 만들려는 악한 일인 줄을 모르고 개와 돼지처럼 은혜만 붙드는 자들을 찢고 물어뜯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나옵니다. 여기 분명히 주시겠다는 것은 눅11:9-13절에 성령이라고 밝힙니다. 왜 성령입니까. 성령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라 했습니다. 진리는 예수입니다. 즉 예수에게로 인도하시는 영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주체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셨고 마침내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만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본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나를 예수의 자리로 데려가시는 영입니다. 나의 자아가 죽임을 당하고 오직 예수만 기뻐하고 예수의 말씀만 따르는 자로 살도록, 그것이 진짜 행복이며 천국임을 깨닫게 하는 곳으로 성도를 끌고 가는, 인도하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성령을 구하면 결단코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말은 곧 모든 성도는 예수의 철저한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도라면 자아 부정의 길로 가고야 말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편하고 잘되고 성공하여 자아를 만족케 하는 길을 가게 하는 성도란 없다는 말입니다.

12절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접속사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근거로 하여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런 내용입니다. 자기의 행위나 자격이 아니라 예수의 은혜만을 붙드는 자라면 결코 타인의 행위와 자격으로 비판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기 의를 붙드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거룩과 의로움을 거절하고 무시하며 물고 뜯을 것입니다. 은혜만 붙드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만을 붙들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을 구하게 되어 있고 결단코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 즉 성경이 의미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어떻게 대접하셨습니까?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 부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사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은혜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접하시고 대우하신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대접을 받은 자임을 아는 자라면 자신도 하나님을 그와 같이 대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베푼 만큼 다시 돌려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정도는 세상도 다 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예수가 천국의 권리와 권세를 모두 포기하고 이 땅에 오사 자기죽음으로 우리를 대접하셨습니다. 나의 행위와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죄인이 무조건적으로 무한한 사랑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대접을 받은 우리도 역시 예수와 같이 죽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권리행사와 권세를 누리려는 내 안의 욕망이 죽어 오직 예수의 뜻만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예수가 주시는 십자가 사랑의 은혜만 거저 붙드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죄인을 대접하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생명의 대접을 받았으므로 내 안의 육적 자아가 죽고 예수의 생명이 살아 올라오는 성도로서의 하나님 대접을 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