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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서영훈-2013. 1. 24.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3. 5. 15.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유다왕 히스기야를 협박하고 겁주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 그리고 그 신하 랍사게에 대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당시 애굽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 제국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초라한 유다는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으로 당연히 눈치를 보고 약탈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랍사게의 입을 통해 유다와 히스기야를 협박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준다는 말을 믿지 말라, 이제까지 앗수르 앞에 복속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의 거짓말을 듣지 말라, 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자기의 신을 의지하다가 저렇게 폐허가 되고 쑥대밭이 된 것을 너희가 보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러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앗수르의 말발굽과 병거, 칼과 방패 앞에 쓰러지지 않은 나라가 없고 복속되지 않은 나라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울 수 밖에 없고 타협하거나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목적으로 살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세상의 누가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누가 세상의 비정하고 무서운 살아남기의 싸움에서 예외일 수 있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무용지물이라고, 헛된 일이라고 우리를 세뇌시키고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을 고착화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18:30-31을 보겠습니다.

“30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세상이 언제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대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을 헤쳐나가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언제나 타협하자, 세상을 목적으로 살자, 세상이 너희로 먹고 살게 하고 부요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8:31절에도 뭐라고 합니까? 앗수르에 항복하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세상의 보상과 눈에 보이는 욕망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 세상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센 놈입니다. 누구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거센 협박과 공격 앞에 우리는 매일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내몰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이 나를 죽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히스기야가 뭘 했습니까? 14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랍사게가 보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하소연을 합니다. 왜 하소연일까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앗수르가 죽이겠다고 하면 죽는 것입니다. 한 번도 그들의 공격 앞에 살아난 자가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그들이 죽이도록 내버려두는 것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기도는 매우 무력한 방법입니다. 구체적인 기술이거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는 우리의 방법과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세상 앞에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세상의 목적과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그 싸움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라는 명목으로 힘을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세상을 목적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는 소원일 뿐입니다.

사실상 기도는 세상이 죽이겠다고 달려들 때 나를 죽이도록 내어놓는 것입니다. 나를 내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죽음에 살지 않고 부활에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선 세상에서 망하면 죽는 것이라고 우리를 협박하지만 세상에서 망하는 것으로 끝장나지 않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나를 죽이도록 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서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목적하여 살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떼를 쓰고 울고 금식도 합니다. 참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의 방식과 결정과 선택을 통해 세상이 우리의 다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다름과 신자의 다름이란 바로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나를 죽이도록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음을 보이는 고차원의 존재를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살겠다고 아우성이고 더 성공하고 더 벌겠다고 더욱 세상을 목적으로 살아가니 그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세상의 협박과 공격에 삶이 흔들리고 불안한 인생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히스기야의 기도는 자기가 살겠다고 나를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아니라 저들이 비방하는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보이시며 하나님만 홀로 한 분이신 창조자, 구원자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라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와 다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괜찮은데, 우리가 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상관없는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훼손되며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이 비방을 받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기양양하던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18만5천명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체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목적하여 살면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기세 등등하게 위세를 떨치고 공격하며 협박하여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끝장을 내겠다고 달려드는 세상 앞에서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나를 죽이도록 내 줄지라도 우리는 부활하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또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결국 우리가 손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세상의 공격과 협박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생존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목적하는 복된 인생들 다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