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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선생님~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5. 8.

선생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듣고 있어요.

들으면서 교회 고등부 시절을 떠올리고 있네요.

 

갈 데 없는 고등부 남녀 학생들이 우르르 떼지어 선생님 댁으로 쳐들어가면 냉장고가 탈탈 털릴 때까지 계속 먹거리를 내오시던 박선생님과 뭘 모르는 천방지축 청소년들을 방에 가득 앉혀놓고 너희들은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 이런 곡, 어때, 하시면서 들려주던 차이코프스키네요. 이 책은 꼭 읽어보아야 사람이 된다. 하시면서 서가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 중 우량도서(그때 한창 유행이던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나르시스 운트 골드문트)을 제가 골라들자, 이런 책은 더 커서 읽어야 좋다. 혼돈 스러운 책이다. 하시면서 압수하셨던 기억까지 고스란히 떠오릅니다)만 골라 주시던 기억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과 깊은 겨울 밤(겨울 방학 내내 선생님 집은 그야말로 참새 방앗간이었잖아요) 그야말로 히히덕거리던 순진무구하신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잊으셨겠지만 저를 보고 너는 미우라 아야꼬 같은 작가가 되어라, 하시면서 덕담도 해주셨어요.  고등부 1학년 때, 그러니까 제가 (손으로 헤어보고 있어요, 나이를요)만 열 다섯살 겨울에 지은 이상한 짧은 소설이 고등부 문집에 실렸을 때, 참 깊고 멋진 작품이라고 격려해주시면서 책 선물도 해주셨어요. 리차드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던가, 그랬어요. 

제가 이렇게 볼품없지만 작가로서 살아가게 된 것은 선생님의 아낌없는 격려도 한 몫 단단히 했어요.  

 

저도 어떻게 하다보니 제자가 몇 명 생겼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그 제자들에게 선생님처럼 가슴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지만 아~직 멀었다는 자각과 자책이 나를 조금은 슬프게 합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인생의 멘토로서 신앙의 멘토로서 사십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면서도 멋지게 변함없이 저에게 보여주십니다.

게다가 이제는 한달에 한번 독서회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만나 뵙게 되니 매월 두번째 토요일이 다가오는 금요일 밤부터 아니, 실은 그 월요일부터 가슴을 설레이게 하십니다. 감사해요. 저에게 이렇게 만남의 기쁨을 주시는 존재로 지금까지 옆에 계셔주셔서요.

 

그리고, 매해 스승의 날 즈음에 다시 선생님을 떠올리고 몇 글자 선생님께 연서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열 다섯 살에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그때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이 하신 말씀, 하시는 행동 그 모든 것이 저의 마음을 울리고 저의 생각을 깨우치고 저의 행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멀리 계실 때도 만나지 못할 때도 선생님은 늘 생생하게(시퍼렇게, 라고 강조하고 싶지만 꾹 참고) 존재감을 나타내시면서 저의 삶 속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지팡이 역할을 해주고 계셔요.

 

그러면서도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무모하게 몸으로 부딪쳐버리는 굴곡진 삶 속에서 어떻게 선생님의 발걸음을 좇고 싶으나 어리석은 반항심과 삐딱한 고집으로 많은 시간을 어리석게 살아온, 제자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하지만, 늘 '내가 다 알고 있지'하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은근하게 보내주시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법어 하나를 슬쩍 흘려주십니다.

죄송해요. 선생님의 책 선정(아이고, 재미 없었던 불타 석가모니) 의 영향으로 불교 용어가 무심결에도 튀어나옵니다.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고 이곳에 들어왔는데 말도 채 시작하기 전에 알람이 울려버립니다.

오늘, 많이 바쁜데, 깊은 밤 다시 들어와 이어가야 할까봐요.

 

선생님, 일단 이렇게 끝을 맺고 싶어요.

선생님만 떠올리면 엇나갔던 마음도 다시 잡게 되고, 이런 모습을 선생님이 아시게 되면 실망하실 거야, 하는 마음이 때때로 방황하는 나의 허한 마음을 많이 다잡아주었다고요.

얼마나 신속하게 이 글을 이어갔는지 사라장과 협연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 채 끝나지도 않았네요.

오늘은 내내 선생님을 떠올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의 옆에서 지켜보고 계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