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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똘레랑스

성당, 절, 그리고 교회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100미터 전방에 있는 것들

 

 

 

"제가요 어제 담배가 떨어져서 편의점에 갔거든요. 그런데 5000원이 남아서, 국익에 보탬이 되고자 로또를 샀지요. 미사 전에는 절대 확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너무 궁금해서 좀 전에 번호를 확인하고 말았지 뭡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 떨어졌더라구요..."

 

 

얼마 전 주일 아침, 집에서 100미터 전방에 있는 동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강론의 서두를 신부님은 그렇게 시작했다.

해피 스모커라 자처하는 나에게는 매우 흡인력 있는 강론이었다. 경건하게 미사포을 쓴 여신도를 비롯한 미사 참석자 역시 모두 웃음을 터뜨렸음은 물론이다.

 

여름 들어, 더위를 핑계 삼아 24킬로 떨어진 모 교회를 살짝 외면하고 100미터 전방에 위치한 ‘성당’이라는 -남이라면 남이고,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남은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지만 상당히 가깝기는 한, 하지만 몇 몇 개신교도들은 이단이라고 매도하기도 하는- 색다른 종교행사에 서너 번 참석한 바에 의하면 예배의 형식은 매우 경건하되, 신부들의 강론은 그다지 엄숙하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개신교의 설교보다 더욱 실생활적으로 부각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씀들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허황되게 강요하기도 하는 개신교의 설교보다 훨씬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사실이다. 밖에서 생각하기에는 신부들에 대해 너무 경외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던 것이 미안스러웠다. 소도시여서인지 몰라도 신부님들은 대개 젊었고, 쾌활했고, 솔직했고, 유머가 많았다.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경건 일습의 신부 이미지와도 많이 달랐다.

 

 

언제인가 월드컵으로 세계가 시끌시끌했던 주일, 또 100미터 전방의 동네 성당에 갔더니 강대상 앞에 선 신부님의 강론 서두는 이러했다.

 

어제 밤늦게 청년들과 호프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축구 보고 노는데 아, 글쎄 어느새 날이 밝더라고요... 시간이 그렇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정신이 그다지 맑지 않아서 고민임다~~ 오늘 정신 바짝 차리고 미사를 무사히 잘 집전해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걱정임다~~..,

 

그러니까 신부님께서는 경건한 주일 새벽까지 성당의 젊은이들과 호프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시면서 날밤이 새도록 유쾌 상쾌 통쾌한 시간을 가지셨다는 말씀이었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그 고백 아닌 고백을 듣는 신도들 모두 유쾌 상쾌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신부님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어! 하는 정죄가 섞인 비난은 절대 없었다. 오히려 인간다운 면으로, 솔직하게 부각이 되는 모습이었다.

죄 많이 지은 여러분은 앞으로 이렇게 사시오, 하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는 투의 화두를 한, 두 개 슬쩍 알게 모르게 던져놓고, 길게는 십분, 짧게는 5분 이내에 강론을 끝내는 신부님이 그렇게 멋져 보일수가!

 

타 종교에 대해서도 그다지 배타적인 면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일테면 신부님이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말 충격적인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개신교인들은 교회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인지 구원의 확신이 아주 뚜렷합니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은 그냥 성당에 나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편안하다...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정말 큰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으신가 봅니다?

 

 

나의 개인적은 바람은 개신교의 예배 설교 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하여 좋은 점과 부러운 점 본받아야 할 점을 나열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질이 떨어지나? 오히려 끔찍한 배타주의에 염증을 느낀 많은 교인들이 그 넓은 아량에 감동받아 더욱 교회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 주일에도 오전 9시에는 매우 존경하고 좋아하는 목사님의 예배 실황 중계를 인터넷으로 함께 참여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혜 받았다. 그 교회가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가끔 참석해도 좋으련만 그 교회는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그냥 네가 사랑하는 그 교회나 열심히 다니거라. 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졌다. 넵! 제가 뭐라고 했나요. 저는요 교회를 옮긴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요 가끔 성당에는 들락거리고 싶어요.

그렇게 감격적인 예배 후에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집안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100미터 전방의 근처 성당으로 가서 11시 미사를 드렸다. 결론, 매우 좋았다!

좋은 점이 많아서 샘이 날 정도였던 미사. 그 중에서도 좋았던 것은 큰 기도였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 세계의 평화를 위한 기도, 감옥에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독거노인을 위한 기도... 적어도 형식에서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복신앙은 볼 수 없었다.

신부의 주관이 섞이지 않은 강론은, 최고였다. 그냥 말씀만 전할 뿐이었다. 강론 속에 그 잘난 자신의 학식이나 지성, 가르치려는 영성, 위에서 아래로 내리까는 듯한 엄포 등은 없었다.

 

 

얼마 전에는 일주일 동안, 성당, 절, 교회를 모두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나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초하루기도회를 간다는 불심 깊은 친구를 따라 집 근처에 있는 봉선사를 갔다. 봉선사에는 한 여름 연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산책길을 아주 잘 만들어 놓아서 가끔 와서 걷고는 한다. 국수와 부침개가 맛있는 찻집도 있고, 절에서는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도 운영하고 있다. 차를 내오는 분이 어찌나 상냥하고 자애로운 웃음으로 맞아 주는지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는 개종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오래 앉아 있지는 않는다.

도서관 강좌를 듣는 회원 중에는 불교도가 꽤 있어서 가끔 그 실비 찻집에 들러 서비스로 주는 강냉이도 먹고, 아주 진하고 맛있는 대추차도 마시면서 은은한 향내에 취해 있기도 했다.

 

실은 우리 교회에서도 초하루기도회가 있다. 좀 뉘앙스가 불교 냄새가 나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담임목사님이 정성스레 초하루헌금 봉투까지 만들어 나누어 주면서, 헌금봉투 앞에 소원기도를 적으라는 말에 질색하는 우리 남편, 아직도 시험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이기는 하지만.

나야 될 수 있으면 참석하려고 하고, 몇 번 참석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유불선적인 종교 마인드를 개신교에도 끌어들이는 것 같아 영 마뜩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쩔 것인가. 담임목사님이 주장하는 좋은 점만 생각하려고 애쓰면서 마음을 비웠더니 나름대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저렇게 해주시옵소서, 믿습니다의 신앙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또 그렇게 매달리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도의 전체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나 역시 나의 개인적인 취미를 내려놓으면서까지 40일을 작정하고 마음을 비우면서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날마다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는 것처럼, 초하루기도회에 참석하는 어떤 분들에게 그 시간이 또 다른 역사의 체험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하루기도회 헌금봉투를 일부러 제작하고 나누어 주고, 그 봉투에 기도제목을 써서 내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너무 쌈박하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돈 놓고 돈 먹기” 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도원에 가면 부흥사들이 맨날 큰소리로 떠들고, 협박하고, 회유하는 내용과 엇비슷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고.

 

요즘은 새로 짓는 교회에는 1층 로비를 활용하여 로뎀 카페니, 해서 구역 주민들에게 개방을 하는 공간을 많이 만들고 있는 추세다. 좋은 생각이다. 누구나 와서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곳, 친구들이나 가족과 산책길에 들러서 차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는 곳, 조용히 혼자 들어와 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지 않은가.

 

불교도 친구는 절에서 운영하는 매점에 들러 커다란 초, 쌀 한 자루를 샀다. 제법 잘사는 친구는 시주 돈도 빵빵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종교 판은(이렇게 말해서 좀 죄송스럽기는 하다) 어디서나 그렇게 무엇인가 바치고 드리고 정성으로 올려드려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예수님 시대 성전에서 비둘기 사고 동전 바꾸고 하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라 웃음이 났다.

절 입구에는 성당의 감실처럼 초를 켜놓은 작은 가마 같은 것이 있었는데, 옆으로 미는 작은 문을 여니 그 안에 온갖 초들이 가득 켜져 있었다.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초에는 이름도 적혀있고, 소원의 내용도 적혀있다.

 

친구는 기와 시주도 했는데, 기와 시주란 기와 한 장을 만원에 사서 그 기왓장에 화이트 펜으로 자신의 소원을 적어 올리는 것이다. 친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요즘 여러 고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무신론자 친구를 대신해서 기와 시주를 했다. 그녀가 정성으로 이름을 적는 동안 나는 켜켜이 쌓여 있는 기와에 적힌 글들을 읽었다. 거의 모든 소원은 건강, 합격, 승진 등이었는데 유독 눈에 뜨이는 내용이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나는 친구와 함께 조용히 그 글을 읽었다.

 

국현아.

고통 없고 평온한 부처님 안에서 극락왕생 하기를 축원한다.

-봉선사에서 아빠가.

 

(나는 폰카로 그 기와를 찍어왔다. 그리고 가끔 마음이 우울해지거나 가라앉을 때 그 사진을 찾아서 본다. 그 글을 읽으면 세상의 집착이나 애착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거 같다.)

 

 

친구가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 동안, 나는 미얀마로 성지 순례를 가는 신도 무리들 곁을 서성거리면서 그들의 여행 일정을 곁눈질하면서 같이 소화해 내었다.

미얀마. 불교의 성지!

사실, 8월 초에 미얀마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우리 교회 해외 선교팀과 함께 취재팀으로 합류할 생각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동남아 해외 선교를 거의 이십 년 동안 해왔는데 한 번쯤은 직접 참여하여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 해외 선교를 가기 전에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교인들이 막상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거의 미친듯이, 목숨걸고 선교에 몰입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왔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어떤 것을 느꼈길래,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얼마나 강력하게 체험했길래! 나는 정말 궁금했고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를 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였던 터라, 봉선사에서 만난 성지 순례 팀은, 두 종교의 각기 다른 방향의 여행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극히 편협하고 옹졸한 나의 생각으로는 마음 편하게 잘 사는 곳에는 굳이 전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회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테면 이슬람 국가처럼, 국가의 종교가 하나인 경우. 온 국민이 하나의 종교로 일치되어 있는 경우. 하지만 모른다.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어렸을 때, 불심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또 종교의 자유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셨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는 종교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가서 거의 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향냄새를 좋아하고, 올곧게 타오르는 향의 연기로 좋아하고(그래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좋아서) 어딘가 절을 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리고 절밥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 특히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반찬들은 정말 맛깔스러운데 그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은 튀각이었다. 다시마를 기름에 튀겨서 설탕을 솔솔 뿌려놓은 튀각 때문에 나는 할머니에게 절에 빨리 가자고 조르기도 했다. 그 영향이었을까? 다른 개신교인들은 절에 가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는데 나는 풍경 소리도 좋아하고, 법고를 두드리는 소리도, 목탁 소리도 무척 좋아한다. 그냥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불교문화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언제인가 문인들과 문학기행을 가면서 강화도 보문사에 들렀을 때, 장내 방송으로 읊어주는 독경 소리가 하도 좋아서 넋을 놓고 듣다가 그만 일행을 놓친 적도 있다. 보문사 아래 주막에 모여 막걸리와 밴댕이회로 낮술을 거나하게 걸치는 바람에 이후의 스케줄이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절에서도 미얀마를 가고 교회에서도 미얀마를 가는데 목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기웃거리다가 안내문을 보니 템플스테이에 대하여 설명한 팸플릿도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가끔 TV에서 소개해 주는 템플스테이에 필이 꽂혀 있던 나로서는 개신교에서는 그런 비슷한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 속이 상할 정도였다. 도대체 그런 좋은 프로그램 같은 것은 왜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기도원 말고, 수도원도 말고, 일박 이일 정도 머물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곳.

어쨌든 봉선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안내하는 팸플릿을 하나 집어와 고이 모셔두었다. 언젠가는 꼭 템플 스테이를 갈 것이다.

 

 

하긴, 올해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중세의 수도원을 업그레이드 시킨 침묵의 집에 가서 일박이일 동안 내면의 소리, 그리고 저 위에서 들리는 소리(^^), 등등을 청취하면서, 갈래갈래 흩어진 마음을 줍느라 나름대로 용맹정진하기도 했다.

나는 개신교의 기도원보다는 가톨릭의 피정의 집이나, 절간의 템플 스테이가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개신교에서 젤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번잡함, 시끄러움, 너무 많은 프로그램, 목청 큰 목사...(쓰려고 보니 너무 많아 이만 생략해야겠다.) 요즘 들어 정신 차린 개신교에서 관상기도와 침묵을 할 수 있는 조용~한 수도원을 짓는 쪽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 같아 내심 좋아하고 있다.

 

염려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종교이든 겉에서 대강 보면 그럴 듯한데, 문제는 깊게 알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일이 수두룩하다는 점. 종교 자체는 흠이 없지만, 종교를 믿는 인간들의 흠 때문에 얼룩이 심하게 생긴다는 점. 어디서나 인간들이 물을 흐려 놓는 거니까. 신부도 인간, 신도들도 인간. 나는 인간의 그 약함을 인정하고, 사랑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잖아, 하면서 큰소리 쳐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들은 모두모두 나의 친구들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한 달에 두 번은 교회가고, 나머지는 성당에 가서 미사 드리고 싶은데, 그건 안 될까...? 저녁 산책으로는 봉선사나 보광사 법당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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