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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어머님이 누구니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5. 7.

201654일 (이글을 들고 수필모임에 갔다)

 

어머님이 누구니

 

 

문득 어머니.

나는 박진영의 "어머님이 누구니"라는 노래가 어머니에 대한 노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극적인 춤과 자극적인 노랫말에 지극히 미미한 존재로 끼워 넣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요즘 추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선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소 신파적인 GOD"어머님께"에 푹 빠지는 것도 아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혼잣말처럼 되뇌는 랩에 코끝이 찡해지는 여운은 있지만.

누구나 어머니에 대하여 일정 부분 부채의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불효자이니까. 살아 계실 때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돌아가신 후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본성일까? 그런데 왜 나는 엄마가 살았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그토록 무심한지 모르겠다.

 

난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냥 보였다. , 엄마는 이렇구나. 엄마는 저렇구나 하면서 엄마에 대한 지식의 베이스를 쌓아갔다. 그 속에 사랑이 있었는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김수영도 아닌데, 나에게 엄마는 그냥, 가구 같았다.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고 물질이 풍요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세계 안에 갇혀 지낸 것 같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꾸었고, 동화 속 세상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갔기 때문에 일상 속의 가족에게 상처받을 일이 없었다. 책 속의 세상이 그 시절 나를 지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현모양처 형이었던 엄마는 분홍 레이스실로 무려 여든 몇 개의 꽃을 만들어 나의 치맛단에 달아주었고, 데이지꽃이 가득한 잠옷을 매일 입혔고, 나를 앉혀놓고 갈래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달아주느라 금쪽같은 아침 시간을 허비했다. 그렇게도 잘해주었는데 엄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니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나의 인생에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토록 미미하다니. 대화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다. 엄마가 나에게 알려준, 혹은 가르쳐준 삶의 교훈은 다섯 손가락도 헐렁하다.

일하는 거 배우지 마라. 그런 거는 저절로 알게 되니 책이나 열심히 읽어라.”

그것은 엄마가 가르쳐준 몇 안 되는 교훈 중의 하나였다. 다행히 지금 이 나이까지 엄마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 물론 나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듯 엄마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마음이 넓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홀시어머니 외동아들에게 시집온 엄마는 끔찍한 시집살이에 상처가 많았다. 눈물이 많고 하소연도 많고 연약했다. 허영심도 많았던 것 같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엄마의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과도한 과외공부로 힘이 좀 들긴 했다.

 

나의 인생에서 엄마에게 두 번 맞았는데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것이므로 불만도 없다.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이 지나쳐 매달 때깔 좋은 한복에 숄을 두르고 교실까지 담임을 찾아왔다. 키가 컸고 늘씬했던 엄마는 요즘 말로 패셔니스타여서 무슨 옷을 입어도 멋졌지만 특히 한복이 아주 잘 어울렸다. 무슨 상담을 했을까. 오전 내내 미장원에서 다듬었을 봉곳한 고데 머리는 엄마 스타일에 딱 맞았다. 딸깍, 하면 열리는 한복용 장지갑을 열고 하얀 봉투를 선생님 책상에 놓는 모습을 나를 위시한 반 친구 거의 모두가 곁눈질하고 있었다. 나는 멋쟁이 엄마가 한 달에 한 번씩 담임선생님을 찾아와서 본의 아니게 공개적으로 와이로(?)를 멕이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가난하던 시절이었으니.

 

엄마의 장지갑에는 정말 많은 돈이 참빗처럼 촘촘히 쟁여져 있었다. 고액권도 많았다. 언젠가 한 장 슬쩍 빼냈는데 엄마는 알지 못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습관적으로 지갑을 뒤져 십 원씩 빼내어 용돈은 꿈도 꾸지 못하는 동네 친구들 간식을 댔다. 나중에는 점점 액수가 커져서 결국 발각이 되었지만 엄마의 지갑에 손댔다고 야단맞은 기억은 없다. 아버지의 사업 뒷바라지를 했던 엄마는 날마다 미용실에 들렀고 날마다 한복을 입었고(왜 그때는 외출복이 한복이었을까) 날마다 외출했다. 나는 엄마의 부재가 싫지 않았다. 엄마를 기다린 기억도 전혀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좀 이상스런 아이이긴 했나.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엄마가 관련된 어떤 기억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곤 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한 장면.

1991년 봄, 환갑잔치를 두 달 앞두고 엄마가 돌아가셨다. 삼오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 봄 행락객들을 태운 차들로 고속도로가 꽉 막혀있었다. 휴게소에 들를 수도 없었다. 차는 일분에 일 미터씩 겨우 바퀴가 굴러 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결국 소복 차림으로, 거추장스러운 치마 자락을 한손으로 부여잡고 차에서 내렸다. 오후의 봄 햇살이 따가웠고 눈이 부셨다. 중앙 분리대의 좁고 긴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 라이터를 당겼다. 첫 모금을 넘기는데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칭얼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차에서 내린 몇 몇 행락객도 함께 분리대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개무시했다.

파란 하늘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저잣거리 에 좌판을 벌려놓은 노파처럼 쭈그리고 앉아 겉도는 치마를 한손으로 그러모은 채 맛나게 담배를 피웠다. 내친김에 답답했던 고무신도 벗었다. 풀잎들이 소복의 굴레에서 벗어난 맨발을 간질였다. 그 순간, 참 좋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평화로웠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나의 생애 첫 번째 담배는 부엌 서랍 속에 숨겨져 있던 엄마의 환희 한 개비였다. 엄마는 수년 동안 병적으로 고통당했으므로 위안이 필요했을 것이다. 흡연은 엄마에게 정말 많은 위로를 선사했고 이후 나에게도 수십 년 동안 기가 막힌 위안이 되었다. 담배연기처럼 독하고 아득했던 열아홉의 봄을 나는 환희 한 모금으로 시작했으나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파산 후 좋았던 점은, 엄마와 부엌에서 맞담배를 피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현모양처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착하고 음전한 여자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했다. 우리는 다정했다. 부뚜막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는 고등어구이를 뒤집으며. 그 장면이야말로 엄마와 가장 다정했던 기억이리.

 

(1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