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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유다

유월의 신부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2. 6. 19.

주일, 한 달만에 교회에 갔더니 지하 홀이며 단상이며 꽃장식이 대단치도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꽃무더기들이 여기저기에 나라비로 서 있는데 한눈에 봐도 '고품격' 꽃들이었다. 그 전날인 토요일 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싱싱한 꽃들은 은은한 향기도 여전했다. 흠흠. 향기를 맡던 아들이 말했다.

-이거...한 덩어리만 해도 십만원은 넘을 것 같다. 너무 멋지네.

우리는 꽃 한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집으로 몰래 가져갈 수 있을까에 대해 잠깐 연구했지만, 주일 아침의 절도 행각은, 그것도 교회에서의 절도 행각은 신자의 양심상 위배되는 일로 결론내렸다. 그러니까...나름 양심적인 아들과 나를 꽃도둑으로 만들만큼 멋진 꽃다발이었다는 말씀.

그날 밤 교회친구들과의 번개에서 그 호화판 결혼식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데, 아들과 교회동창인 진희의 결혼식이었고 꽃장식에만 150만원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것도 유명 꽃 디자이너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원가로 책정된 가격이 그렇다는 말이다.

으윽...그 비용은 우리집 두 달 생존 비용과 맞먹는다...

너무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고군분투하며 수십 년을 홀로 살아온 권사님은 딸의 결혼식을 아주 잘 치르고 싶었던 것일까?

 

 

예배 시간에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설교를 듣다가(목사님은 3주째 재물에 관한 설교를 하시는 중이었다. 그 주제는 너무도 뻔하게 많이 바쳐라, 였다. 아, 그토록 진부한...아, 그토록 편협적인...) 핀트가 안맞으면 목사님을 향했던 시선을 확장시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꽃다발을 집중 탐구했다. 백장미의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백합과의 개량품종인 듯한 꽃 이파리의 수려한 예술성, 뭐 그런 것들...

오늘 아침 설교집을 뒤적이다가 이런 말씀을 본 기억이 난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보다 제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좀 듣고 싶다는.

아멘입니다. 뭐, 생각하면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 같기는 하다. 서로 사랑하면 재물을 아낌없이 줄 것 아닌가 말이다. 내 것은 다 니것이나 마찬가지야, 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내가 가진 것을 뒤집어 탈탈 털어서 먼지부스러기까지 드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고,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물심양면으로 기증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않던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결혼이란, 내 것 니가 다 가져도 좋아. 내 몸도 니가 다 가져, 뭐 그런 거 아닐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의 가장 피크가 결혼식인 것 같다는 말씀. 물론 그 날부터 하향곡선이 사람에 따라서 급하게 또는 완만하게 그어질 테지만 말이다... 그런 것을 시간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라는 놈은 불타는 사랑을 식게 만들고, 어제도 안고 싶고 내일도 안고 싶은 마음을 무디게 만들고,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웠던 상대방에게서 사사건건 티눈을 세밀하게 찾아내도록 만들고, 상냥하던 목소리, 점잖던 목소리를 대책없이 커지게 만들고, 눈매를 사납게 만들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게 만들고, 미운털이 쑥쑥 자라게 만들고, 안보면 못살것 같던 마음을 안봐야 살 것 같게 만들기도 한다.

 

꽃도둑보다 천 배는 극악무도한 시간도둑이 결혼의 신비를 살금살금 갉아먹는 동안, 내 손에 장을 지지며 단언하건데 그 사이에 神이라는 존재가 개입하지 않으면 배우자는 '평생 원수'로 살기 십상이다. 물론 나름대로 가면은 다 몇 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인들 앞에서 부드럽게 원만하게 행복하게 보이게 하는 재주들은 가지고 있겠지.

그 슬픈 하향곡선속에서 神은, 사람의 생각의 허무함을 하시는 神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늘 기도하라는 말도 안되는 듯한 이상스런 명령을 주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그 성령을 마음속에 넣어주심으로 나름 감사와 나름 기쁨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지난 토요일 결혼한 진희도 유월의 신부이지만, 내일인 6월 20일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는 나 역시 유월의 신부이다.

요즘은 혼수라고 더 좋아한다는 속도위반으로 애를 먼저 낳는 통(그 시절 속도위반은 집안어른들에게 뭇매를 맞고 집을 쫓겨날 수도 있는 중대범죄였는데 참 격세지감이다....)에 대체 언제를 결혼의 시작으로 삼아야할지 매우 아리송하기는 하지만 결혼식을 기점으로 한다면 31주년이다.

세상에나... 어떻게 한 남자와 30년을 넘게 한 지붕아래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았단 말인가!

새삼스레 내가 대견해진다^^ 단언하건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은 미친 짓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사랑은 더 미친 짓거리가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랑한단 말인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고 하지만 시간 도둑은 사랑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도 알고 타인도 알고 하나님도 안다. 그냥, 모르는 척 살아버리는 것이다. 情이라는 미묘한 단어아래 숨어들어가면서 말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삼십 여년이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을 한 남자와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나는 살았다. 행복과 불행을 극명하게 나눌 수 없는 이상한 상태이긴 하지만 나라는 존재로 인해 한 인간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기도 했다. 앞으로도 많이 즐겁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은 미친 짓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나는 그냥 미친 척하고 살기로 했다...

 

 

지난 토요일 많은 사람의 축복속에 결혼한 진희가 삼십 년 쯤 지난 후에도 꽃다발처럼 진한 사랑의 향내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으니 神의 가호가 그들의 결혼 생활 내내 그들을 지켜줄 것을 믿으므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유월의 신부들이여, 조금 전 스콜같은 소나기처럼 가끔 빗줄기같은 절망의 후려침이 생을 적실지라도 두려워말지어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이 마음속에 동행하시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