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동안 집이 아닌 곳에 머무르면서 네 번의 주일을 맞았는데 교회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예배는 드렸다. 그러면 주일성수가 되는지 안되는지 유권해석이라도 좀 듣고 싶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결심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서. 그 모든 것에 '나의 하나님'도 포함시킬까 말까 쫌 고민은 했다. 하지만 이내 그 고민을 내려놓았다.
마음가는 대로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나를 내버려두고 싶었다.
집에서 살 때, 그 수많은 주일을 목숨걸고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면서 철저하게 지켜왔었는데 집을 떠난 마당에,
집에서의 생활과 똑같이 '미친듯이'교회를 향하여 뛰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은 한적한 시골이었지만 물어보니 마을 어딘가에 자그마한 예배당은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예배당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약의 십계명과 주일을 지키라는 신약의 말씀이 있다. 그것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십계명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안식일을 누리라는 부언 설명이 있다. 쉬라는 것이다. 그 '쉼'에서 어떻게 예배가 포함되었는지는
신학자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모르겠네?
좀 다른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매일 예배를 드린다. 어쩌면 나에게는 매일매일이 주일이 되는 셈이랄까?
새벽에 일어나 동영상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누구말처럼 입에 가래톳이 돋는 것같다^^ 새벽을 예배로 시작하지 않은 날은 거의 없지만 일년에 몇 번 그런 경우가 생겼을 때, 온종일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마치 화장실 가서 뒤처리 못한 사람처럼 껄쩍지근한 심정이 되어 정서불안같은 정신적 장애까지 겪는 것이다. 예배도 중독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된 경험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집이 아닌 곳에서 어느 일정 기일이 지나자 다시 집에서의 습관이 도지는 바람에
매일 알람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예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새롭게 알게 된 싸이트의 새벽기도회까지 포함하게 되는 바람에 매일 두탕씩 새벽예배를 드렸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우습다, 내 모습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예배로부터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아우성치더니만 어느 순간이 되어서는 집에서보다 더욱 열심히 예배에 몰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뿐인가!
잠을 자고 싶으면 아무 때나 누워 자고, 책을 읽고 싶으면 밤을 새워서 읽기도 하면서 하루를 내 마음대로 쓰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그 역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지금 생각해보니 열흘 정도 지난 즈음부터) 아침 산책마다 MP3에 저장한 설교 말씀을 한 바닥씩 듣고 저녁에 가벼운 운동을 하러 나갈 때도 역시 귓구멍에 설교말씀을 꽂고 길에 서서 홀로 아멘, 하거나 너무 감격스럽거나 심장을 찌르는 말씀이 있으면 그 자리에 한참 서서 극악무도한, 죄인중의 괴수인 나의 가슴을 치면서 내탓이오, 내탓이오, 모두 내탓입니다를 자복하는 시간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미쳤어!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짓이람, 하면서 또 다른 의미로 내 가슴을 치는데 MP3를 통해 들려오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인즉슨,
"그래, 내가 예수 때문에 미쳤다, 죽어도 예수를 위해 죽고 살아도 예수를 위해 살고, 미쳐도 내가 예수를 위해 미친다, 어쩔려!"
.... 그러니 더 말해 뭐할까...
아마...나는 소설중독에서 설교중독으로 완벽하게 변환되는 과정이었던 모양이다.
그곳의, 책들이 엄청나게 들어찬 서재에서 열 권 정도 되는 소설책을 독파했고, 목침만한 두께의 문예지를 서너 권 완전 해부했고, 그밖에도 각종 책들을 술렁술렁 넘기거나 몇 개의 섹션을 골라 파헤치면서 소설에 대한 회의는 극에 달했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하나님만 아실테지만,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이 훨씬 짧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늙을 것이고, 눈은 침침해질 것이고, 몸은 약해질 것이며, 신체의 어느 부분은 너무 약해서 병이 침범할 것이고, 일필휘지로 휘둘렀던 펜끝도 무디어져서
작업진도는 갈수록 느려터질 것이다. 내게 남은 알토란같은 시간들을 저 (쓰레기같은)소설에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
어머나! 이렇게 희한한 결론에 이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게 모두 하나님의 작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집을 떠나고 싶다고? 떠나게 해주마. 그런 기회가 온다면 온종일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만들어주지.
인간들을 떠나 홀로 있고 싶다고? 수도사같은 방, 허름한 모텔같은 방 하나 줄테니 마음대로 하려므나.
은행, 통장, 가족, 친구, 지인, 교회, 얽키고 섥킨 세상의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환경이야 못만들어 주겠느냐, 내가 이래뵈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환경이 멋지게 조성되면 글빨이 장난아니게 뻗어갈 것 같다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도록 조치할테니 한 번 해보려므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제멋대로(언어를 순화한다면 너의 의지대로)살고 싶다고? 니 맘대로 하세요~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했다.
무인도가 아닌 이상 이 세상의 어느 곳이든 인간은 있게 마련이었고, 혼자 있고 싶다고 아우성치던 것과는 달리 막상 홀로 있게 되자
외로움을 타는 나를 새삼 발견하게 되었고, 소설에 풍덩 빠져 즐겁게 헤엄치고 싶었지만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으며, 하나님 손바닥에서 악착같이 벗어나고 싶었지만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고 있던 손오공 같은 몰골이 되었다.
게다가 나의 진면목을 가감없이 깨닫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야비하심도 경험했는데, 혼자 있어봤자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과 약함과 악함과 추함과 완전 퇴폐적인 본성이 꼬물꼬물 기어나오기밖에 더 하겠느냐, 뭐 그런 하나님의 비웃음을 듬뿍 받았다. 으윽. 기어이 나를 함몰시키는 슬프디슬픈 마음의 '간증'을 하게 만드시는 야비하신 하나님!
기어이, 내 입에서 로마서 8장을 고백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나 모르겠넹
오호라, 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바울의 탄식 말이다. 그 가슴아픈 탄식이 '그러므로 찬송하리로다'로 귀결되기까지의 고난을, 나는 이주일동안 충분히 누렸다. 누리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한다.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을 버선발로 뛰어나가 허그해주시는 아버지 말이다.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여러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살았다는 고백의 찬송가의 버전으로 말하고 싶다.
한 달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돌아온 나에게, 마치 누가복음 탕자의 아버지처럼, 잘 돌아왔다고 금가락지 대신,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부러워했던 이쁜 십자가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십자가 목걸이 완전 좋고요, 깊게 허그해주시는 하나님 품속이 완전 따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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