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트렁크
하나님은 신비한 트렁크를 가지고 계시다. 그 트렁크는 아무나 쉽게 열 수 없도록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비밀번호를 알게 하시고, 트렁크를 열게 해주시고, 그 트렁크 안에 있는 보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리고 그 트렁크는 주일에는 더욱 자주 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날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더욱 충만해서일까? 얼마 전, 나는 하나님의 신비한 트렁크를 열어 볼 수 있었다. 비밀번호도 모르던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글은 놀라운 비밀번호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주일 교회 근처 음식점에서 모임이 있었다.
올해 초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 터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던 나는 성지순례단의 공식적인 해체식과 더불어 성지순례 책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광고를 통해 모집된 열일곱 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한 열이틀 간의 순례여행은 분명 주님이 주신 축복이었고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된 것은 물론이다.
순례단 총무를 맡았던 장로님의 진행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음식점 별실에 자리 잡은 순례자들은 음식점의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예배를 진행했다. 대표기도를 맡은 순례자는 우리끼리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데시벨(?)로 기도하고, 주위 손님들에게 민폐가 될 것을 우려한 진행자는 찬송가를 마치 시처럼 읊어주셨다. 순례자들은 모두 눈을 감고 마음으로 곡조를 넣고 마음으로 따라 불렀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찬송가가 시로, 그 시는 곡조 있는 기도로, 그 기도는 진한 은혜의 감동으로 영혼에 스며들었던 시간이었다.
책은 훌륭했다. 아무리 감동이 진한 여행이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에서 사라지기 쉬우니 우리의 순례기를 책으로 발간하자는 이야기는 순례여행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성지순례기라고 하면 무지하게 은혜로운 글만 가득할 것 같지만 얼결에 작가가 된 장로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글을 끌고 가지 않았다. 순례자들을 배꼽 쥐게 만들만큼 재미있고 맛깔 나는 글로 가득 차 있었다. 거룩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속내 깊은 거룩한 이야기들이 꽉 차있는 책이었다고나 할까. 여행 후 석 달 만에 순례자들과 다시 함께 하니 여행의 순간들이 오롯이 살아나 그리스 해변의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손을 잡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여러 해프닝을 떠올리며 웃음바다가 되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은 나 역시 예배 시간이 달라 그동안 자주 뵙지 못했던 분들을 만나 너무도 반가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반가웠던 사람은 바로 가이드였다. 출국 직전 공항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행사측에서 파견한 가이드는 당연히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이드는 하나님의 트렁크에서 마술처럼 튀어나온 보물이었다. 그 보물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날에야 비로소 그 비밀번호를 알게 되었다.
인천공항 출국 심사 때부터 함께 했던 가이드는 마흔 한 살의 노총각으로 진지해 보이고 말이 없는 남자였다. 가이드는 온종일 순례단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인도했을 뿐만 아니라 순례를 마치면 일일이 방을 노크해서 개인의 애로점들을 체크하고, 까다로운 기구의 사용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쳐주고, 때로는 해결사 노릇까지 도맡아했다.
나를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도 바로 가이드였다. 터키를 거쳐 그리스에 도착한 첫 날, 나는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멀쩡하던 트렁크가 갑자기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트렁크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가득 담겨 있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꼼짝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지도 않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속수무책이었던 나는 한참 혼자 끙끙거리다가 결국 가이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별 희망을 갖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는 비밀번호를 가이더가 어떻게 알겠나. 트렁크를 해머로 내리치고 다시 트렁크 하나를 사는 수밖엔 없겠구나, 뭐 그런 최후방편도 생각했다. 가이더는 여전히 열리지 않는 트렁크 앞에 멍청하니 서 있는 나에게 물었다.
“권사님 정말 비밀번호를 모르세요?”
“설정해 놓지도 않았거든요!”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가이드는 두 손 놓고 맥없이 서 있는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도하듯 그렇게 트렁크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트렁크의 번호를 차례차례 돌리기 시작했다. 0000, 0001, 0002... 0100, 1000,... 그렇게 가이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계속 기약 없이 번호를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우직한 가이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금고털이범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덜컥, 하면서 거짓말처럼 트렁크가 열렸다. 별 소망없이 바라보던 나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가이드가 마치 자신의 트렁크라도 되는 것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열렸어요! 과연 트렁크는 제멋대로 쑤셔놓은 옷가지들을 염치도 없이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땀을 훔치면서 가이드가 말했다.
“권사님 트렁크 비밀번호는 1113번이었네요.”
나는 어떻게 해서 비밀번호가 1113으로 맞추어져 있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가이드가 어떻게 해서 1113까지 진도를 나갔는지 그것도 모른다. 아는 것은 단 하나. 엉뚱하게 잠겨버린 나의 트렁크를 인내와 사랑으로 비밀번호를 풀어낸 가이드가 당시로서는 나에게 구세주였다는 것뿐. 그동안은 말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그 후부터는 마주칠 때는 가끔 미소도 교환하고 호텔 로비에서 커피도 같이 마시고 유적지에서는 나의 구가다(?) 디카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여행 도중 문제가 생겼다.
가이드의 진실함을 알게 된 순례단 중 몇 분이 적극적으로 그를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이드님, 우리 교회에 나와요. 꼭이요.”
시간만 나면 그렇게도 열심히 졸라대는(?) 열성분자 순례자에게 그냥 빙긋이 웃어주기만 하는 가이드를 보며 나는 불편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분명 문제였다. 그는 성지순례 전문 가이드였다. 그동안 그를 거쳐 간 많은 단체 여행객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였을 테고, 그 많은 순례자들은 각각 자기 교회에 오라고 수없이 전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전도를 권유받았을 것인가!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확고한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저렇게 매일 어린아이 졸라대는 것처럼 귀찮게(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전도하면 전도가 먹히느냐 말이다! 어떻게 보면 순례자들의 말을 존중해야만 하는 가이드에 대한 직권남용적인 횡포가 아닌가. 평소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노방전도에 대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깨에 띠를 두르고 전철 앞에서 전도하는 열성 전도대원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않았던 나로서는 ‘전도는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틈만 나면 가이드에게 접근해서 ‘우리 교회 좋아요, 우리 교회에 오세요, 같이 신앙생활 해요.’ 하는 열정적인 순례자들의 전도행각(?)을 볼 때마다 나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민망했다. 좋은 소리도 한 두 번이지 지금 가이드는 참 견디기 힘들겠다... 여행이 끝나고 공항에서 가이드와 마지막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열성적인 순례자 몇 분은 전도를 잊지 않았다. 꼬옥 우리 교회에서 만나요~
믿을 수 없는 일은 그 다음 주일에 일어났다.
가이드가 정말 교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일본의 쓰나미 버금갈 정도로 놀랬다. 강권에 의하여 어쩔 수없이 인사치레로 그날만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또 다시 놀랐다. 그 다음 주에도 역시 가이드는 교회에 왔던 것이다. 그날 그는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했고 그 후부터 해외 출장이 아니면 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왔고, 새신자 양육까지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트렁크가 열리고 보물 같은 가이드가 짠, 하고 나타나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때까지 내 힘으로 열 수 없는 하나님의 트렁크였다. 비밀번호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 소감을 나누는 순서에서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저는 여러분들과 같이 여행하면서 여러분의 친절과 배려가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좋으신 분들이어서 더욱 마음이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오래 전 교회에 발을 디딘 적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저는 이제는 교회를 정하고 잘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던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계속 진실하게 권유하시기에 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순례자 중에서 어느 누구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 때는 정말 교회에 갈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는데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느 권사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이번 주 교회에서 만나자고요. 그래서 당장 나오게 된 것이지요. 좋은 교회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잘 나오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나를 한 방 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가이드는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사람이었던 것이고, 그 준비에 맞추어 순례자들은 열심히 권고했던 것이고, 내가 그토록 <과잉 전도자>라고 생각했던 열성분자에 의하여 정확하게 가이드를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이끌어낸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졌다. 순례자 한 분 한 분도 소중했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낸 장로님도 소중했고, 찬송가를 시처럼 읊어주신 진행자도 소중했고, 속으로 나에게 엄청 욕을 먹었던 열성파 순례자의 훤한 얼굴도 소중했고 진솔한 가이드의 고백도 너무너무 소중했다.
그날의 거룩한 모임에서 나는 하나님의 비밀번호를 열 수 있는 방법을 다시 깨달았다.
하나님의 트렁크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열린다. 그 비밀번호는 나의 호, 불호와는 전혀 상관없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잊고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전도에는 正道가 없다... 나는 그동안의 나의 교만이 부끄러워 얼굴은 뜨거웠지만 곧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비밀번호를 뒤늦게라도 깨달은 나 역시 하나님은 소중하게 생각하시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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