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초대, 맑게 소외된 자리
소설가 김훈은 소설 <공무도하>에서 작가의 말을 이렇게 썼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지난여름의 나 역시 김훈과 마찬가지로 ‘시급한 당면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그렇게 모든 관계를 혐오하고 불신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하여 뒤돌아보는 시간.
그러므로 나 역시 김훈처럼 ‘맑게 소외된’ 자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난 그 어떤 곳 말이다. 그 곳에 가서 새로 태어나야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다 우연히,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맑게 소외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평 수덕산 자락에 위치한 <순례자의 집>이었다. 새로운 개념의 현대적인 기독교 영성센터로 아버지의 품과 같은 안식과 회복의 집이라는 설립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일박이일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만의 여행은 난생 처음이었다. 작은 가방 속에는 쪽 복음과 얄팍한 기도 책자와 노트가 들어 있었다. 시외버스와 마을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으로 그곳에 도착해서 입실 수속을 밟는데 가만히 보니 나처럼 혼자 등록하는 분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배낭을 짊어진 초로의 남자,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 중년의 남자...
건물 곳곳에는 ‘침묵’이라고 씌어 있었고,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은 조용히 스쳐 지나쳤다.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대강의 분위기를 파악했던 나는 호텔 버금가는 멋진 숙소에 짐을 풀고 순례자의 집을 순례했다. 그 어느 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우리는 방문자 모두가 이곳에 조용한 묵상으로 머물고,
또 이곳을 떠나 실 때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순례자로 나아가실 것을 기대합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메디타치오 채플(Meditatio Chaple)이라 불리는 침묵기도실에 들어섰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은 어둑했다. 정면의 불을 밝힌 십자가와 정갈하게 놓인 방석, 그리고 방석에는 내가 좋아하는 기도의자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직하게 들려오는 성가, 눈을 스르르 감게 만드는 기분 좋은 향내가 어디선지 흘러나왔다. 게다가 아무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용솟음쳤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인생길 고단한 영혼을 쉬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 퇴실 할 때까지 나는 그곳을 세 번 드나들었다.
마침 수요일이어서 스물 몇 명의 순례자들과 자율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수요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그곳을 담당하는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신기해 하셨다. 신기하기는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거죠!
그 후 두 달 동안 나는 그곳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한 일박이일도 정말 은혜로웠다.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않고(이 나이에!) 기도하고 대화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재정립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 친구 왈, 그 곳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평생 나에게 감사하겠노라는 맹세아닌 맹세를 했다. 그녀와 아직 교회 앞에서 머뭇거리는 그녀의 남편과도 같이 들렀는데, 얼마 전에는 그 부부가 손잡고 그곳에서 일박이일을 했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가끔은 <맑게 소외된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광야의 남은 길을 노래하며 춤추며 가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초대였다.
안내 팸플릿에 적힌 초대의 말을 떠올린다.
순례자는 집이 없습니다.
그래도 순례자는 집을 필요로 합니다.
하룻밤 고단한 육신을 쉬게 할 그 집이,
인생길 고단한 영혼을 쉬게 할 그 집이
...
이 집을 떠날 때에는
당신은 정녕 집 잃은 자가 아니오니
영원의 집을 향하는 새 힘 얻는 순례자로
광야의 남은 길을 노래하며 춤추며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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