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페는 이슬람어로 존재의 이유를 의미한다고 한다. 느낌이 좋은 말이다.
기독교의 교리문답에서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라고 외우게 했다.
나는 1980년 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문답서에도 그것이 적혀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무엇이뇨’라는 물음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만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부분은 아닌 것 같다.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나에게는 '나의 기쁨'과 '내 이웃의 기쁨'이 포함되어 있다.
나와 이웃이 기뻐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는 그 자명함이 또다시 나를 기쁘게 한다.
주일성수, 헌금, 기도, 봉사 같은 기독교적인 언어는 차후의 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제, 잠시동안의 (인간관계의)불편함으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오해, 혹은 이해해주지 않음(이해해주지 못함)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이유란 말인가.
그 해답은 오늘 오후 현경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주셨다.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
와!!
모든 불편함이 이로써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그것은 똘레랑스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대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크고 작은 갭, 대화함에 있어서 느껴지는 미진함, 갑갑함(어제도 갑갑하다는 단어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었지)
아무리 오랜 시간 마주 앉아 있어도 하물며 수십 년 같이 산 부부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서로 이해한다고?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사람은 자기 깜냥만큼만 이해한다고 말하며 그 이해의 틀은 바늘구멍처럼 좁고 작다.
우리들의 소갈딱지는 딱 그만하니까.
여기에서 또 하나 팁.
그것 역시 현경이 가르쳐준 기도의 방법이기도 한데 'Thank you' 와 'Help me'이다.
모든 상황, 모든 여건, 모든 실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것,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
문제가 풀리자 새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진다.
이쯤에서 나의 할리페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군.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생각을 깊게 하기 위하여 당분간은 '콰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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