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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어제 내가 만난 분은 예수님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1. 20.

Dear J.

어제 만나 반가웠다. 반년은 훌쩍 넘긴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니.

모처럼 쌓인 눈길을 걸어 당신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만났지.

그 걱정 반 기대 반은 또 다른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끝나버렸지만.

가장 기뻤던 것은 당신의 조울증이 작년 11월 23일(인가 하여튼 그 어귀)하나님의 은혜로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말.

 

하지만 또 한편

우리는 만나지만 우리는 만났을까.

나는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나눌 수)있는 용서와 이해와 배려와 사랑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자신을 가장 윗자리에 올려놓는 인간의 본성을 또 한번 확인하게 되었으니.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굳게 믿었지만 알고 보니 그곳에는 막무가내의 믿음으로 똘똘 뭉친 내가 매의 눈을 가지고 좌정하고 모든 인간, 모든 삶의 형태를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있었다는 것도.

 

슬펐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로는 죽을 때까지 죄를 헤어날 방법이 전무하다는 깨달음을 날마다 곱씹는 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왜, 당신과 나를 포함한 예수쟁이들은 중증 치매환자처럼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슬프면서도 기뻤다.

그러니까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예수님이 당신과 나의 손목을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이 아닌가. 죄의 구덩이에서 뒹굴면서도 예수와 동행하고 있다는 그 엄연한 현실은 순전한 찬양을 불러 일으키지 않던가.

 

예수님은 커다란 죄, 작은 죄 하면서 죄의 경중을 비교하지 않으셨는데 큰 죄인 작은 죄인 하면서 죄인의 급수를 따지지 않으셨는데

오, J,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가장 예리한 판단의 날선 검으로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말씀의 핵심을 난자했다.

서로에게 아낌없이(윽) 보낸, 사랑과 말씀을 빙자한 가혹한 정죄의 눈빛을 빨리 잊어야 할 텐데...

그 모습을 우정의 가장 친한 거리인 한 발짝 거리에 마주 앉아, 마치 거울을 보듯 당신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것은 거울이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의 결론이다.

저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원하시는 것일까. 오, 그건 바로 너의 모습이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의 하나님.

그 럭셔리한 바리스타 카페에서 향긋한 내음의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앞에 놓고 나누는 이야기는 참혹했다. 나는 어제에도 다시금 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절감해야 했다.

 

마주 앉아 생각한 것 중의 하나.

이제 어디가서 매일 말씀을 이만큼이나 들어요, 하면서 떠들지 말아야겠다.

이제 어디가서 매일 매순간 이만큼이나 즐거웠어요, 하면서 떠들지도 말아야겠다.

이제 어디 가지도 말아야겠다.

이제 어디 가서 누군가 만나지도 말아야겠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J.

분노에 가득찬 표정을 거두고 서로에게 사과하고 다시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J, 나에게 나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보게 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가 한 때 너무도 좋아했던(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김성수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나?

수십 년 동안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그토록 노력했으나 결국 자신의 (비열하고, 추하고, 더럽고, 도저히 가망없는)실체를 알게 되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 저, 이런 모습으로 그냥 하나님께 나아 갑니다, 하고 엎드리는 것이 가장 신앙적인 삶이라고 하신 그 말씀!

 

Dear J.

그러니까 우리는 감사하고, 우리의 어제 만남을 감사하고, 또 다시 새롭게 자신의 실체를 보고 경악하면서 실낱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바라보게 된 것을 다시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참, 사랑이 가득찬 오늘 새벽의 문자도 감사한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낸 따스한 문자는 나를 감격하게 했다.

사십년을 훌쩍 넘긴 우정이니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니!

 

J, 다시 만날 때까지 거울 속에 비쳐졌던 더러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좀 닦아보자. 타인을 바라볼 때 좀 더 온유한 마음이 되기를, 하나님의 준엄하신  꾸중을 가슴에 마음에 새기기를. 

<네가 누구관대 (함부로)이웃을 판단하느냐!>

 

여기에서 맨 위에  쓴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 말을 써야겠다.

우리는 만나지만 우리는 만났을까.

어제, 내가 만난 분은 예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