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워라, 유진 피터슨이여. 당신의 빌립보서 머리말은 어찌 그리도 아름답습니까!
빌립보서는 바울이 행복에 가득 차서 보낸 편지다. 그 행복은 전염성이 강하다. 몇 절만 읽어도 금세 그 기쁨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춤을 추는 듯한 단어와 기쁨의 탄성은 곧장 우리 마음 속에 닿는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사전을 뒤적거려 알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 가운데 책을 보고 익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삶의 특성을 익히려면 도제 제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수년간 충실한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힌 것을 자신의 모든 행실로 보여주는 사람에게 직접 배워야 한다. 물론 설명을 듣기도 하겠지만, 제자는 주로 '스승'과 날마다 친밀하게 지내면서, 기능을 배우고 타이밍과 리듬과 "터치"같은 미묘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법을 익힌다.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위에서 말한 스승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울은 우리에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거나, 행복해지는 법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 기쁨은 그가 처한 상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편지를 썼고, 그의 활동은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섬기며 스무 해가 넘도록 혹독한 여행을 한 끝에 지쳐 있었고, 어느 정도 위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내면으로 경험한 메시아 예수의 생명에 견줄 때,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기쁨은 충만한 생명이며, 어느 한 사람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넘쳐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 앞 교회의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에 다녀왔다. 5시 알람이 울려 눈을 떴는데 눈앞에 집 앞 교회의 아담하고도 사랑스러운 예배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빨리 그곳에 가서 조용히 앉아 기도드리고 싶었다. 그곳은 앉아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곳이었다. 우리 집 앞에 이런 아름다운 장소가 있다니! 지난 주에 몇 번 갔고 이주일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한다기에 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가고 있다.
어제,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수원에 있는 장례식장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만난 우리교회(우리 교회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이 특새에 나오라고 하셨다. 우리 교회도 어제부터 특새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5시 6분 첫 전철을 타면 갈 수 있다. 5시 50분에 예배가 시작되므로 시간도 딱 맞다. 이전에는 그렇게 해서 몇 번의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40일 동안 개근할 정도로 열심히 다녔다. 버스가 운행하는 시간이 아니어서 전철역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살림 중에서 택시비는 따로 떼어내어 내 손에 딱 쥐어주셨기 때문에(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해진, 딱 40일 택시비만큼의 후원금^^) 부담없었다.
그런데 이사해서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외곽이어서 택시가 없다. 야밤에는 마치 수도원처럼 고요해지는 곳인 것이다.
전철까지 차편이 없어요. 우리 동네는 택시도 없어서요.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담임목사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예전에 얼마나 깊은 산골짜기였는지 재미있게 말해주셨다. 그렇군요.
모두 그렇게 이해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콜택시를 부른다면? 요금에서 1000원만 더 주면 콜택시가 집앞까지 오는데?
가고자 결심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 수 있다.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가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길고도 긴 오가는 시간은 말씀을 들으면서 가면 허비하는 시간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그냥 새벽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싶은 것이다. 그곳이 우리 교회이든 집 앞 교회이든 다르지 않았다. 사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 교회에 가면 오히려 번거롭다. 많은 분들과 오가며 인사를 하는 것이 나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어제 장례식장에 가기 위하여 스타렉스 뒷좌석에 4명이나 구겨 앉아서 가면서도 누구나 붙잡고 한없이 말을 늘어놓으시는 어느 권사님을 피해 앉느라고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숨도 죽이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교회분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든지 모르겠다. (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르는 거지?)
오늘 새벽에도, 참으로 은혜스러운 말씀이 끝나고 불꺼진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좋은 곳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나의 하나님을 생각하니 더욱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게 크게 틀어놓은 찬송가를 따라 몇 곡을 불렀다. 찬송가 한 장 한 장 마다 그 곡에 얽힌 숱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곡조있는 기도라고도 하는 찬송가의 가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마치 기도처럼 찬송가를 불렀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 예배당이 좀 추워서 다리를 끌어안고 기도했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기도하니까 정말 하나님의 자궁(하나님도 그런데 있나몰라)속 처럼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세상의 모든 음악 다시듣기를 열어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시를 필사했다. 사순절 묵상집을 읽고 다시 메시지 성경을 펼쳤다. 커피 향이 그윽하게 퍼지는 나의 방은 온통 행복의 향기로 가득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마침 유진피터슨씨는 이런 글귀를 나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행복에 가득 차서 보낸 편지다...."
나도 정말 행복에 가득 차서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런 글귀를 만나면 나는 그만 깜빡 넘어가버린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 기쁨은 그가 처한 상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 기쁨은 내가 처한 상황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아침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이 글은 내가 행복에 가득 차서 보낸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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