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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2016, 대심방을 받았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3. 4.

201634일 금요일

 

                                                                                      2016, 대심방을 받았다

 

 

지난주일 교회 예배 설교에서 심방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요즘은 심방을 귀찮게 생각하거나 꺼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의 우려가 섞인 목소리였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교인들의 마음도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된 것이다. 주위의 모습도 그러하고 나 역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옛날에는 대심방 순서가 돌아오면 집안 대청소부터 했다. 어느 해인가는 심방 날 즈음하여 깨끗하게 도배까지 새로 한 적도 있다.

속도들과 쉴 새 없이 의견 교환을 하고(목사님께 무엇을 준비했느냐, 다과가 겹치지 않게 하자, 커피 많이 드리지 말자, 점심 대접은 누가 할까, 심방 감사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속도 전체의 선물은 무엇으로 할까, 등등)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는 데 필요한 소요시간까지 잘 계산해서 몇 시에는 어느 집, 그 다음 집은 몇 시, 이렇게 CEO 하루 일과처럼 거의 정확하게 일정을 짰다.

 

심방이 있는 주간에는 집안 곳곳을 다니면서 눈에 띄는 데로 지저분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치운다.(대심방 30년 동안 목사님 일행이 한 번인가 두 번 겨우 사용한 전적이 있는 욕실이 TV에서나 나올만한 모델 하우스 급으로 업그레이드되기도 한다)

일 년에 봄, 가을 그렇게 두 번 집에 오시는 목사님은 예수님과 거의 동급이어서 목사님이 마시다 남긴 커피 잔도 신비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목사님이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대심방이 시작되었다고 좋아하면서 목사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 보기 힘들어졌다. 내 주변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심방 접대를 극진히 하던 분들도 세월이 변하여 온종일 목사님만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전에는 거의 모든 주부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업주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러므로 너남 할 것 없이 시간에 쫓기게 된 것이다.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에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대심방의 위력은 이전 같지 못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목사님이 친히 집까지 오셔서 온 가족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해주시면 하나님의 대언자 되시는 분의 슈퍼파워에 힘입어 집 전체가 삐까번쩍하게 윤기가 흐르게 되고 가족들은 건강해지며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병치레도 안하고 자식들은 용돈도 많이 주고...이런 식의 생각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의 과부 엽전 두 닢 같은 피 같은 돈이 혹시 목사님의 자제분의 미국 유학비에 들어가 허랑방탕한 불금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망상까지 마구 겹쳐지는 바람에 헌금하고도 찝찝하고 뒤통수 땡긴다는 어느 주위 분의 고백도 있었다. 이런 불신은 교회도, 교인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거개의 교인들은 자신의 헌금이 하나님께 다이렉트로 송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목사님이 세상 사람보다 그다지 도덕적이지도 않으며 목사님이 교인보다 그다지 신앙심이 깊지도 않으며 목사님이 사회인보다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불행이라면 불행이랄까.

 

어제, 우리 집도 봄 대심방을 받았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집안을 정돈하더니만 어제 아침부터는 걸레까지 들고 다니면서 이 구석 저 구석 목사님 맞이 청소를 했다. 난 노트북 앞에 앉아 딴 짓하고 있는 사이 혼자 슈퍼에 가서 어마무시하게 크고 싱싱한 딸기와 방울토마토까지 사들고 왔다. 목사님 접대용 과일이었다.

나 무슨 옷을 입을까, 수염을 안 깎아도 될까, 머리는 감겨 줘, 집은 이만하면 깨끗하지? 베란다도 정리했어. 이 말은 남편이 온종일 한 말이다.

 

심방 시간은 원래 1시에 교회에서 출발하여 한 집을 심방하고 곧바로 우리 집에 오는 스케줄이었다. 나는 넉넉하게 세 시 즈음으로 시간을 맞췄다. 그런데 오전에 동행하시는 지역장이 전화를 했다. 첫 집과 우리 집 사이에 한 집이 끼어들었으니 조금 뒤로 시간이 늦춰졌다는 것이다.

그럼 네 시 정도는 될까요? 아마 그 정도 일 겁니다. 통화 후,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 집 심방 시간을 네 시 반에서 다섯 시 즈음으로 정정했다. 수십 년 심방 받은 경험에 의한다면 심방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30분에서 길어야 40분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저녁 약속이 있어서 6시에는 집을 나서야했지만 늦을 우려는 없어보였다.

네 시가 넘어서도 연락이 없다가 네 시 반이 되어서 겨우 문자가 왔다. 심방이 늦어지고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목사님과 함께하시는 일행은 615분에 오셨다. 온종일 기다리다 지친 남편의 성화에 우리 집 심방은 건너뛰시라고 말씀드리려고 전화를 했는데 거의 다 왔다는 말씀에 아무 말도 못하고 끊었다.

급박하게 오신 목사님은 연신 죄송하다, 너무 늦었다를 연발하셨다. 목사님이 무슨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외출 시간에 맞추어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시고 내가 강권하여 남편이 정성들여 사놓은 딸기 겨우 몇 알 드셨다. 옆에서 보기에도 체하실 것 같이 급하게 드시니 내 마음도 많이 불편했다.

 

많이 늦어지니 느긋하게 기다리라는 문자를 받고 넵 하고 답은 했지만 그 시간 이후로 조바심이 나서 죽는 줄 알았다. 세상 사람들과의 시간 약속도 몇 십분 내외로 종결된다. 아니, 요즘에는 오 분 십분만 늦어도 석고대죄를 해야 할 지경으로 서로 시간에 쫓긴다. 음식점은 물론, 동네 미용실조차도 무턱대고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예약제로 운영되는 게 현실 아니런가.

 

얼핏 들은 바로는 목사님께서 회의시간이 길어져서 첫 심방부터 늦어졌다고 한다. 교회 측에서는 회의와 심방 중에서 회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일까? 집으로 (손수) 찾아가는 심방이나 조금 시간이 딜레이 되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시는 것일까?

심방 시간이 잡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길게 회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일부러 기다리는 교인들 진이 빠지게 할 생각이야 없으셨겠지만 혹시 윗분들의 생각이 너무 느슨했던 것은 아닐까? 회의를 진행하시는 분이 심방오신 부목사님이 아니셨기에 목사님의 실수나 잘못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녁 약속이 없었더라면 조금은 더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겠지만 오후 내내 기다리다 지친 남편을 달래느라 애 좀 써야했다.

 

3시 즈음에 예정되어 있던 심방이 6시가 넘은 시각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심방 시간도 교인들과 목회자와의 약속이다. 어디에서부터 삐긋거렸는지 나는 모르지만 심방 시간 짜는 것을 좀 신중히 했으면 좋겠다.

 

노파심에 부언한다면, 어제 심방 오신 부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담임목사님을 포함한 우리 교회 목회자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셨다. 짧은 시간에 말씀을 전하셨지만 참으로 진실하고 감동 깊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

목사님께 제가 딴지 건 것은 절대 아니고요 심방을 받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심방 받는 마음가짐도 많이 변화(?)했다, 세월 많이 변했다, 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쓴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원고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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