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꺼내기에 앞서, 어제의 말씀으로 인한 짧은 생각임을 전제하옵고, 그 생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을 양해해 주신다면 아주 편한 마음으로 마치 가장 친한 친구와 나누는 것처럼 속내를 털어놓겠나이다. 그러므로 저의 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라는 것도 명심하여 주시옵소서.
어제 주일을 맞이하여, 행복의 극치에 다다른 마음으로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며 예배당 명당 자리에 좌청룡(이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지 애비를 닮아 성질이 장난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서른 네살짜리 아들놈입니다) 우백호(이쪽은 엊그제 나에게 그토록 포악-결혼생활 삼십 몇 년만에 두번째 당하는 일도 있었읍지요-을 떨었지만 '우리는 누구를 미워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라는 어느 분의 설교를 가슴깊이 새김으로, 또한 다행히 당시의 저의 상황은 은혜에 젖어사는 시간이었으므로 아주 잘 견디고, 그러므로 그 비행과 잘못을 눈감아 주게 된, 필시 평생을 나의 속을 썩이면서 함께 해로할 나의 남편되시는 분이십니다) 가운데 끼어 앉아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격과 기쁨을 온전히 누리면서 목사님의 입술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복된 말씀은 천국의 비유였는데 왜 늘 듣던 말씀 있지 않습니까.
천국의 가치를 알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산다는 세 가지 비유,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52절까지의 말씀 말입니다. 설교문이 있으면 다시 읽어보고 그 문맥을 파악하려 했으나 지금 교회 홈피에 들어가보니 설교조차 제대로 올라있지 않은 상황이었기로 그저 저의 팔랑귀로 들은 말씀을 아뢸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나이다.
천국의 가치라.... 천국이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라면.... 결국 통치권이 하나님의 주권하게 있다는 의미일텐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도 황송하고도 자다가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을만큼 대단하고도 기가 막힌 지위를 확보한 우리들이 만세하면서 들어갈 곳인데....그렇게 생각하니 아니, 나는(변함없이 졸고 있는 좌청룡과 졸릴 때마다 사탕달라고 옆구리 툭툭 치는 우백호 포함하여 우리는, 거기에 플러스 이 예배당에 함께 모여 앉아있는 이분 저분 앞엣분 목사분 교사분 성가대분 모두, 거기에 플러스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는 모든 사람은 이미) 천국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기쁨에 젖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요.
어쨌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예를 들게 되셨는데 10년 전 미얀마 신학교 건립에 헌금 작정하신 네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제법 긴 사연이었으나 거두절미하고 그 분들은 자그마치 1억이나 하는 금액을 서로 먼저 내겠다고 하는, 입이 딱 벌어지는 미담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듣는 저로서는 제일 먼저 그 네 가족의 신앙의 여정을 수십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한 진한 감동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사도행전이라고나 할까요. 그분들의 삶에 역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익히 알고 있는 저로서는 아, 정말 대단하시다, 놀랍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핍절하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특히나 저 네 가족이 흔쾌히 헌금한 액수에 비하면 애개개~ 할 정도로 소소하여 초라하기까지 한 액수인, (단돈, 겨우)천 오백만원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다녔던 작년의 몇 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나이다. 글쎄요 남들에게는 고까짓 꺼 때문에 할지는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평생 만질 수 없는 백 오십억이나 천 오백억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또한 그러면서, 세상에, 나는 어찌하여 단돈 삼천 구백만원(흑흑 정작 제가 쓴 돈은 천만원이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버려 매달 백 몇 십만원 이자만 내던 시절이 2년이 넘으니 말입니다) 때문에 신용불량자의 반열에 설 뻔하다가 기어이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으며 어찌하여 나는 미얀마 신학교 건축헌금은커녕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치킨 한 마리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십여년을 살아왔더란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순간 저는 심각한 슬픔에 빠져버렸습니다. 아침까지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던,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겼던 나의 가난이 그 순간 '비참'한 모습으로 나를 함몰시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지? 이게 뭐지? (이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제가 즐겨 듣는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즐겨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서는 고스톱 판에서 사랑하는 하나와 아들이 툭하면 던지는 말인데 들을 수록 맛깔나서 저 역시 때에 따라 사용하는 말입니다)
약간 멍한 상태로 목사님의 입술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천국의 가치가 귀한 것을 아는 분들은 이렇게 자신의 것(그것도 1억씩이나!)을 아낌없이 기쁨으로 바쳐서 신학교도 세웁니다)을 들으면서 심각한 의문에 사로잡혔나이다.
지금 하나님이 설마 나를 자학하고 반성하고 슬퍼하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게 아니라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해야하겠나이까.
마치 사도행전에서 간수가 바울에게 부르짖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하나님.
있는 사람은 1억씩 헌금하니 없는 사람도 형편에 따라 천국의 가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팔아 천국을 사는 심정으로 백만원이나 천만원 없는 사람은 십만원이라도 바치라는 말씀이옵니까.
천국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는 미얀마 신학교를 세우는 데 헌금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말씀이옵니까.
천국의 가치는 내것을 내가 아닌 타인(이웃, 교회, 장학재단, 불우한 자들 모두 포함하여)에게 내어 놓는 행위로 인정받는다는 말씀이옵니까.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기쁨은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억이나 천이나 백만 단위의 현금이나 현물로만 증거되는 것이옵니까.
하나님은 목사님의 입술을 통하여 1억씩이나 헌금하시는 네 가족의 예를 드시면서 저에게 깨닫기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씀이옵니까.
중간 즈음에서 저는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늘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예배 드림을 감사하고 찬양을 드림을 감사하고 기도와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하고, 이처럼 오늘도 눈을 뜨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바라보고 나에게 호흡이 있는 것을 감사드리나이다. 사람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분복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나이다.
아낌없이 드리는 마음을 주신 저 네 가족의 영혼과 육신을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게 하여 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과 찬양드리나이다.
샘솟듯 솟아나는 즐거움과, 저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셔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신 나의 아버지께 오늘, 지금 이 순간 최대의 찬양을 드리나이다. 저의 사랑이 미얀마까지 가지는 못할지라도 내 주위에서 나의 눈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사랑하고 베풀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을 주실 것을 믿나이다.
바라기는 저의 사랑의 손길이 다른 슬픈 영혼을 어루만지는데에도 사용될 수 있도록 저를 도구로 써주시기를.
(지금 이 순간, 늦잠에서 겨우 깨어난 꼴통 남편에게 열심히 다리를 안마해주는 것으로 아침의 문을 여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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