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8일 금요일 여행 5일째. 사실은 4일째.
일정이 빡빡하다고 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히에라 폴리스 유적지를 향하여 출발했다. 터키는 광활하다. 탁 트인 벌판이 나의 답답했던 가슴을 풀어주었다. 어디에서나 하늘이 맞닿아 있다. 작은 언덕과 골짜기, 개울 둑길을 따라 산 중턱을 향해 줄지어 올랐다.
그곳은 이미 이른 봄이었다. 산언덕에는 들풀이 한 뼘이나 자라고 있고 여기저기 씀바귀의 하연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풋풋한 풀 냄새와 함께 상쾌한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아직 차갑지만 싫지 않은 느낌의 봄바람이었다.
소풍. 그렇다. 나는 지금 소풍을 왔다. 멀고 먼 이곳으로, 한국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고 모든 잡념을 떠나 혼탁했던 마음을 조금씩 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소풍이라고 읊었던 천상병 시인처럼 나 역시 이 세상을 다 산 후, 즐거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히에라 폴리스에는 노천의 원형극장이 있었다.
화면으로는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원형 계단에 앉아 열변을 토하는 가이드의 설교 아닌 설교를 들었다. 박학다식한 가이드는 너두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욕망에 순례자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조용히 앉아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의 지난날들을 되집어 보고 싶었지만 가이드는 그런 침묵의 기회는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려나. 나는 말 잘 듣는 순례자 틈에 앉아 머릿속으로는 나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그것은 상념 가득한 지난날에 대한 회오이기도 했으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 시간 역시 지나가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빌립순교 기념교회에 들렀다.
‘순교’라는 엄청난 단어에 나는 압도당한다. 대체 어떻게 순교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를 위하여 살지도 못하는데, 내가 내 가족을 위하여 살지도 못하는데, 내가 내 나라를 위하여 살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니...
돌. 돌. 돌...터키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돌이었다. 그것은 건물의 잔해이기도 했고, 눕혀진 조각품들의 한 조각이기도 했고, 땅에 깔린 박석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유적지는 돌, 돌, 돌 뿐이었다.
나는 돌을 좋아했다. 돌로 만들어진 탑이나 벽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돌의 무심함이 좋았고, 돌의 굳건함도 좋았다. 무심과 굳음은 나에게 없는 것이므로 더욱 그리워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늘 연약했고, 늘 잘 넘어졌다.
히에라 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노천 온천이 있었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온천물 속에는 고대의 돌기둥 같은 유적물들이 눕혀져 있었다. 그것들은 온천 물속에 잠겨 오랜 세월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온천이 있으므로 관광호텔도 있고, 너른 커피숍과 관광 상품을 파는 상점도 있다.
따스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주문할 수 없었다. 일정이 빡빡한 여행의 단점이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으니 안타까웠다. 노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한담하는 유럽 관광객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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