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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16. 쿠사다시의 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호텔이 있는 쿠사다시로 가기 전, 사도요한 기념교회에 잠시 들렀다.

일정에 없는 곳이었는데 그것은 선교사 가이드의 강력한 추천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속내를 안다. 전 일정 유적지 탐방은 여행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은 개인이 다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터키의 시세로 본다면 대단히 비싼 입장료였다. 더구나 문 닫기 바로 직전에 억지로 끌고 온 것이다.

나는 또 그러려니 했다. 선교사 가이드는 터키에서 살아야 하니까 가급적 부수입을 많이 챙겨야 하는 현실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냥 편하게 선교차원이라고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런 것에 그 어떤 페이소스를 느낀다. 사람은, 사람이므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운명에 대하여.

 

이십여 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오른다.

병원 영안실에서 실컷 울다가 하얀 상복을 입고 화장실에 갔다.

용변을 보면서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슬퍼 죽을 지경인데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경악을 느꼈다. 신은 사람을 만들면서 기본적인 욕구에 의하여 먹고 자고 성교하게 하면서 인간의 비참함을 늘 잊지 않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죽을 것처럼 슬퍼도 절대 죽지 않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데 오로지 그 생각만 하고 싶은데 또 한편 먹고 마시고 화장실에 가야 한다. 펑펑 울다가도 오줌을 누러 다시 화장실에 가야하고 나 같은 경우에는 상복을 입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동도 켜지 않은 차의 뒷좌석에 앉아 흐느끼면서 담배를 피운다. 울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썰렁한 요한기념교회를 추위에 떨면서 돌아보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요한의 묘 옆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단체 사진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사진 찍읍시다, 하면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잡고 이, 삼초 동안 정지 모션으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이 연극 같았다.

 

쿠사다시에 도착하니 날이 어느덧 저물었다. 길고도 긴 하루였다.

이번 여행은 날마다 숙소를 바꾸어야 하는 강행군이므로 매일 트렁크를 들고나는 일의 반복이었다. 내 트렁크는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컸고 더 무거웠다. 열흘 치 옷을 코디해서 넣었으니 트렁크 안에는 옷이 거의 전부였다. 물론 맨 아래 깔아놓은 담배도 있다.

가이드는 내 트렁크가 무겁다는 것을 알고 고맙게도 배려해 주어서 될 수 있으면 입구 가까운 곳에 방을 배정해 주었다. 낑낑 거리고 밀고 당기고 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나 보다. 거의 모든 순례자들은 버스 짐칸에서 자신의 트렁크를 잘도 꺼내고 씩씩하게 잘 끌고 가는데 나는 그것이 참 힘든 일이었다. 일단 노트북까지 포함한 짐이 너무 많았다.

쿠사다시 호텔에 도착해서도 트렁크를 내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운전기사가 내 트렁크를 번쩍 들어 내가 들고 가기 쉽게 해 준다. 매우 고마웠지만 또 한 편 그다지 고맙지는 않은 것이, 일부러 내 몸을 터치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수염을 멋지게 기른 운전사는 턱 보아도 좀 끼가 있어보였다. 그는 유난히 나에게 잘 대해주었는데, 여행지 곳곳에 내릴 때 필요 이상 손도 열심히 잡아주고, 쓸데없이 어깨도 부딪치면서 은근 호감을 표시해 왔다. 어쩌다 마주치면 눈웃음도 치고 하면서 말이다.

어찌어찌 트렁크를 밀면서 호텔 로비로 향하는데 뭔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더니 그만 트렁크 밀대가 쏙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주변에 있던 남자 순례자 몇 분이 와서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져보았지만 별 무소용이었다.

그냥 손잡이만 사용하다가 한국에 가서 AS를 받으세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운전기사가 주변의 사람을 밀치고 트렁크 앞에 섰다.

으쓱 하는 모습이 자신이 잘 할 테니 보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 한 발짝 물러나서 운전기사의 묘수를 관람하는 자세를 취했다. 몸집이 장난 아닌 운전기사는 몇 번 밀대를 만지작거리더니 생각대로 안 되는지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 근육질의 팔 힘을 모두 써서 힘껏 밀대를 빼낸 것이었다.

, 하는 순간, 밀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주위에 몰려 있던 남자 순례자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모두 한 마디씩 한다.

기계는 절대 힘으로 하면 안 되는데....”

권사님이 좋아서 너무 잘 보이고 싶었나봐.”

잘해주려다가 망쳐 놓았으니 이를 어째!”

밀대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박살이 나버렸겠다, 이제는 손잡이만으로 끌고 다닐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당황해하는 운전기사에게 괜찮다고 계속 말했지만 그의 속내는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청 테이프를 들고 와서 대강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밀대 없는 내 트렁크를 룸까지 갖다 주는 것이었다. 과유불급. 운전기사의 과잉 친절이 부른 참사였다.

 

쿠사다시 호텔은 여느 호텔보다 좋은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거실만한 발코니가 딸린 것이다. 타일이 깔린 발코니에는 티 테이블이 있고, 환상적인 디자인의 재떨이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아아, 바로 이곳이야. 묵직한 커튼은 내가 발코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나의 사랑스런 룸메이트 왕언니가 알 수 없게 잘 가려 줄 것이다.

나는 신이 났다. 짐을 풀기도 전에 나는 발코니로 나가 전후 사방을 둘러보면서 나의 취미생활에 악영향을 줄 그 무엇이 없는가 세심하게 관찰했다.

실내도 마음에 들었다. 룸은 문을 열면 널찍한 욕실(비록 변기 레버가 고장 나 룸서비스를 부르기는 했지만)이 있고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제법 너른 공간에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화장대, 트윈 침대가 있는데, 마치 아파트 복층 느낌이 났다. 나는 복층 아파트처럼 입체적인 어떤 공간이 있는 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탁 트인 거실에서 몇 계단 올라가면 식당이 있달지, 작은 방이 비밀스럽게 숨어있달지 하는 공간을 좋아한다. 그런데 마침 그런 룸에서 잠을 자게 되다니.

 

식사 후에 아늑한 룸에 올라와 모처럼 룸메이트 왕언니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왕언니는 이야기하면 할수록 정이 드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나이와 사랑스러움과는 상관없는 것 같다. 자그마한 체구에 화통한 듯 보이지만 어느 면으로는 수줍음도 많이 타는 왕언니는 자신의 칠십 평생을 리얼 다큐로 압축해서 들려주었다. 감동 만땅이었다.

나 역시 나의 여행 기적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몇 십 년 지기 친구처럼 갑자기 가까워졌다. 이야기 끝에 나의 취미생활에 대하여도 고백하고 일단 양해를 구했다. 왕언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별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물론 왕언니 앞에서 담배를 꼬나 물 일은 전혀 없겠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나는 일단 마음 편하게 터놓기로 한 것이다. 사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그동안 은근히 마음이 쓰였던가 보았다. 털어놓으니 새삼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발코니로 나가 불빛이 하나 둘 반짝이는 쿠사다시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새벽 3시 반.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요란한 빗소리와 천둥 번개. 나는 발코니로 향한 문으로 비치는 바깥의 정경을 바라보면서 흥분했다. 나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나의 뼛속까지 드러낼 정도의 섬광과 함께 귀고막이 찢어질 듯 커다란 천둥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세게 나를 후려치는 듯한 빗줄기 소리.

언제일까, 비가 제법 쏟아지던 장마 시즌, 너무도 비를 맞고 싶어서 천변을 산책하는데 일부러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머리카락, 어깨를 적시는 빗줄기가 상쾌했다. 팔목을 따라 뚝뚝 흐르는 빗방울을 보면서 어떤 희열까지 느꼈다.

비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밤에도 비가 오면 창가로 다가가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아침에 일어나 비가 오면 온종일 나른한 센티멘탈리즘에 빠져 몽롱하게 하루를 보내곤 했다.

문학하는 동인들을 만나도 그들 역시 비에 대한 찬사로 입에 거품을 문다. 빗소리가 온종일 정겹게 들리는 저녁이면 문우 중 한 사람은 꼭 번개 문자를 보내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글 안 쓰는 사람에게도 많은 모양이다. 비 오는 날의 주점은 언제나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으니 말이다. 비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다. 비바람치고 천둥 번개가 요란스러웠던 쿠사다시의 새벽은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

빗줄기가 어느 정도 잦아진 아침, 호텔 식당에 내려가니 모두들 새벽의 천둥 번개가 인사였다. 너무 놀랐어요, 하며 입을 모은다. 다른 순례자들은 깜짝 놀라 기도했다는데 나는 가슴 속까지 시원해졌으니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망가진 밀대 주변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바른 트렁크를 겨우 밀면서 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나를 발견하고 또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나도 웃어 주었다. 방송에서 보았던 쿠사다시는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참 많았는데, 그 모습은 채 보지도 못하고 그냥 호텔에서 잠만 자고 다시 떠나려니 너무 서운했다. 그 영상물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야 아무 생각 없겠지만. 그럴 때는 일정이 빡빡한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무릇 여행이라는 것은 느긋하게 그 도시에 머물면서 골목 구석을 다니는 맛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긴 우리 여행은 버스로만 거의 4500킬로를 달린다고 하니 그 엄청난 길을 지나려면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양이 세수하듯 발도장만 찍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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