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 속초까지 번개!
늦잠 잤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그냥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거실 소파에 누워 한 잠 더 잤다. 소파에서 잠이 들기는 처음인 것 같다. 평화로운 시간을 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행복했다.
8시가 다 되어서야 산책을 나갔다. 묵상 등 경건의 시간은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으므로 산책 후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더 늦게 나갔다가는 그 따가운 햇볕 때문에 몇 걸음도 못 걸을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이른 시각에 나서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침의 천변은 놀랍도록 순결해 보인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물 흐르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건강한 색의 녹음이 윤이 나게 반짝거렸다. 다리 위에서 잉어들을 살펴보았다. 팔뚝만한 녀석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모습을 보느라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세워놓고, 쭈그리고 앉아,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채, 모두 시선을 냇물로 향하여 녀석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다. 그 사람들의 순진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기분 좋은 아침산책이었다.
중간쯤 걸어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차가 없는 우리 부부를 위하여 드라이브도 시켜주고 밥도 사주려고 잘 놀러오는 친구부부가 일 때문에 속초를 가는데 동행하자는 전화였다. 속초!
가던 길을 휑 돌아 빠른 걸음으로 집에 와 부지런히 준비했다. 몸놀림이 서툰 남편의 셔츠 단추도 끼워주고, 운동화 끈도 매주고 부산을 떨면서 겨우 시간을 맞추어 나갔다. 친구 부부의 차는 이미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속초까지 번개라,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랄까. 말을 하고 보니 루이스 책 제목과 똑같아졌다. 예지치 않은 기쁨, 이 얼마나 상쾌하고 신나는 말인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에서 기쁨이 찾아온다면 그 기쁨은 놀람과 더불어 따따블로 뻥튀기 될 것이다.
게다가 기분 좋은 일. 속초에 가면 나의 선생님이 계시다는 사실. 잘 하면 만날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막상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선생님은 오늘은 특별히 더 바쁜 날이라는 것이다.
"다음 주에 놀러와. 다음 주는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선생님. 오늘 가는 것이 어디 제 맘이던가요. 친구 남편이 사업차 속초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는 건데요."
"그렇구나. 하여튼 오면 전화나 한 번 해봐."
"넵!"
그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역사적 사건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 쓰려면 소설 한 권은 될 것이지만 두어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등학교 1학년, 교회학교 고등부 교사였던 부부(아내는 고등부 성가대 지휘 선생님, 남편은 고등부 지도교사)였던 선생님이며 내 삶의 신앙의 멘토가 되시는 분. 스승의 날만 되면 편지 한 통을 써서 보내드리는 제자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들.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셨지만 그 맑음과 청순함은 여느 사춘기 아이들 못지않은 분들.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 삶과 신앙의 멘토가 되시는 분이다.
삼십 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우리 부부와 친구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은 옥수수 사먹으면서, 커피 마시면서 한 여름의 땡볕을 뚫고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갔다. 카 오디오에 좀 문제가 있어서 음악을 제대로 멋지게 들을 수 없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 결핍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대신 채워 주었다.
인제를 지나면서 다시 선생님께 전화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집으로 오너라!
"우리 양양에서 막국수 먹으려고 하는데요?"
"일단 오라니까!"
"넵!"
이후, 분에 넘치게 받은 풍성한 사랑의 대접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태신자 집이라는 식당에서 특별히 공수된 회(그곳은 회를 팔지 않는 곳인데 정말 특별주문해 주셨다. 속초하면 회, 회, 하면 속초니까^^), 그리고 기가 막힌 물회, 그리고 대구 지리탕!
너무 맛있어서 술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신이 나서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니 그때야 비로소 아, 안주만 먹었구나, 그런 생각이 났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놀라운 맛이었다.
선생님 집 서재로 쳐들어가 책 한 권을 강탈하고(달라고 생떼를 썼으므로), 친구 부부에게는 선생님의 시집을 마구 뒤져서 싸인 받아 주고, 게다가 남편 몸에 좋은 티백 차까지 한 박스 선물로 받았다.
우리와 같이 있는 내내 선생님은 연신 싱글벙글이셨다. 이유를 물은즉 선생님 왈, 몇 년 전부터 다니는 교회에(선생님은 서울 생활을 접고 몇 년 전에 속초에 정착했다)오늘 전도사님이 새로 오신다는 것이다. 일 년 넘게 전도사님을 구했지만 시골이라 아무도 오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야 오시게 되었다면서 내 일처럼 좋아하신다. 전도사님이 오시면 마중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같이 간 일행과 더불어 우리는 속으로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사님 한 분 교회에 부임하는데 온 교회가 방 청소하고 선풍기 사놓고 단장해놓고,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예전에 세상에서 크게 한가닥했던 우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좀 들어보시라.
"전도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지. 이제 마중 나가서 환영해드리고 잘 모셔야지."
전도사님이라는 단어 대신 대통령이라고 대입하면 오히려 말이 맞게 들릴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선생님께 배웠다. 섬기는 자의 모습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 하는 것. 높은 사람이 낮은 자를 섬기는 것, 예수님이 제자를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듯이 말이다.
우리 선생님은 예수님이다.
귀가길은 기분 내느라고 한계령으로 돌았다. 역시 아름다운 골짜기였다. 중간 중간 쉬면서 팥빙수도 사먹고, 자글자글하게 들리는 음악도 들으면서 집으로 오니 여덟시!
선생님께 전화를 하려다가 전도사님 환영하시느라 정신없으실 것 같아서 휴대폰으로 감사의 문자를 날렸다.
내가 매일 묵상하는 <숭고한 기도> 역시 선생님의 책 선물이 아니던가. 아이고, 나이 쉰이 넘은 제자를 아직까지 키우고 계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남편과 나는 뱃속이 어쩐지 궁금해져서(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허한...) 문어에 술 한 병을 서너 잔 씩 나누어 마셨다. 그랬더니 오늘 하루가 비로소 완벽해졌다. 술이 수면제 역할을 하는지 눈이 슬슬 감긴다. 오늘도 아주 쉽게 잠이 들 것 같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녹작지근하면서도 기분 좋은 번개를 맞은 우리 부부는 오늘 행복하다.
작년인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에 잠시 소개한다면.
버림의 美學
쑥개떡과 된장 한 동이와 책 세권, 바흐의 마태수난곡 CD와 아씨시 성당의 십자가상 액자. 오랜만에 찾아뵌 선생님께서, 하룻밤 자고 돌아가는 나의 보따리에 넣어주신 것들이다.
-다 털어버리고 속초로 와.
선생님은 이 곳 저 곳을 데리고 구경시키면서 이틀 내내 꼬드겼다. 배웅 차 나온 터미널에 한 발 앞서 뛰어가 차표까지 끊어주던 선생님께 나는 말했다.
-다 털어버릴지는 모르지만 곧 갈지도 몰라요.
선생님은 선생님답게 마지막까지 내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
-다 털어버리지 않으면 못 뜨는 법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쑥개떡 포장을 풀었다. 고난주간답게 날은 흐렸고 간간이 오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차창으로 와 부딪치는 빗줄기 사이로 파릇해지기 시작하는 계곡과 산등성이와 들판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입자가 거칠고 간간이 쑥대가 씹히는 개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쫄깃하고 담백했다. 절구로 찧어서일까, 간혹 덜 빻은 쌀 입자가 고스란히 형태를 간직한 채 입속에서 겉돌기도 했다. 선생님과의 오래된 정처럼 투박하고, 씹을수록 혀끝에 진중한 맛의 여운이 남았다.
집에 와 짐 보따리를 풀었다. 역시. 책과 된장 속에 십자가상과 쑥개떡 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다 털어버리고.
쑥개떡이야 단번에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된장은 반년은 족히 먹을 양이었다면 책 세권은 한 열흘 동안 책장을 넘길게다. 바흐의 CD는? 매 해 돌아오는 고난주간이면 볼륨을 높이고 바람에 벚꽃이 꽃비처럼 날리던 정경을 되새겨 볼 것이다. 이태리 아씨시 성당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선생님을 펑펑 울게 만든 저 십자가상은, 이후의 나의 생을 새롭게 가리키는 지시어가 되겠지. 하지만 주전골에서, 오색약수터에서, 화암사 찻집 앞에서, 진전사지 삼층 석탑 앞에서 귓속에 불어넣었던 저 속삭임은 이명처럼 늘 나의 귀를 두드릴 것이다.
노트북 앞, 가장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십자가상 액자를 걸어놓는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는 자신의 발을 가슴에 끌어안고 무릎 꿇은 성 프란시스를 위로해주려 팔 한쪽을 내리고 있다. 아씨시 성당의 코너에, 작고 초라해서 관광객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서 선생님의 눈에 띄어 그토록 울게 만들었다는 액자. 한동안 뚫어져라 사진을 바라보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누구나 십자가상을 보고 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상은 온전히 선생님의 것이다.
바흐를 틀어놓고, 십여 년 넘게 살고 있는 집안을 가만히 둘러본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무엇을 움켜쥐고 있기에 털어버릴 것이 남은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이나 커피는 장소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있다. 정 만나고 싶으면 이메일을 하던지 전화를 하면 될 일이다. 문화적인 향유는 각종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누릴 수 있다. 삼십 년을 훨씬 넘게 다녔던 교회는, 그렇게 오랫동안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움이나 사무치는 과거는 기억 속에 살아있고 그럼으로 누가 빼앗아가지 못한다. 나의 미래는 내가 알 수도, 조정할 수도 없다. 다만 하나님만이 아실뿐이다.
익숙하게 다니던 길이나 장소는 이미 마음속에도 깊게 새겨져있고 그동안 관계했던 지인들은 꼭 얼굴을 보지 않아도 유지될 것이다. 혹, 서로 잊어버린들 어떠리.
마태 수난곡이 들려온다. 문득 불탄 낙산사의 정경이 떠오른다. 속초 터미널에 마중 나온 선생님이 어디를 가고 싶으냐, 고 물었을 때 나는 낙산사라고 대답했다.
-좋다, 오늘은 불자들처럼 절을 세 군데 가야겠다.
선생님이 웃으셨다. 가는 빗줄기를 맞으면서 낙산사 뜨락을 거닐었다. 진전사지와 화암사까지 빗속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갔고, 짙은 안개 때문에 마치 하늘에 떠있는 것 같은 산봉우리를 보았다. 명색이 글을 쓴다하면서도 마땅한 형용사를 찾을 수 없었다.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아까웠다.
귀로는 예수의 고난을 듣고 머릿속으로는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의 잔해를 더듬는다. 아무려면 어떠랴. 장로의 직분을 가졌으면서도 낙산사에 들릴 때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시주함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나에게 또 다른 떨림을 준다. 세월이 좋아 선생님과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노트북에 연결해 더듬는다. 이틀 동안 서너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순을 바라보는 선생님은 이미 사진과 앨범을 다 정리했다고 하셨다.
-나중에 아이들 번거롭게 하지 싫어서 말이야.
나는 그 중 한 장의 사진을 고른다. 주전골 계곡을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이다. 사진에서 얼핏 보이는 계곡의 물소리가 맑게 가슴을 적신다. 뒷짐을 쥐고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향내가 그윽하던 나무 같기도 하고 여전히 푸르렀던 계곡 모퉁이의 산죽 같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이미 자연이 되어버린 선생님은 자아까지 버린 모습으로, 형체조차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있다.
사진을 작게 프린트해서 아씨시 성당의 십자가상 액자 옆에 붙여놓는다. 내가 눈물을 흘리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선생님의 뒷모습이 십자가상보다 더 다가온다. 예전 선생님이 복사해 주셨던 노천명의 작별을 떼어낸다.
나를 어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다오.
그 시구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나는 저렇게 멀리 가버린 선생님께 언제쯤 다 털어버렸노라고 전화를 드릴 수 있을까. 된장을 다 먹을 때쯤? 아니면 내년 고난주간 다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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