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 교회 두 번 가는 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믿음의 동역자 친구가 사 준 <예수원> 표 기도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기도의자: 다른 곳에서도 파는지 알 수 없으되, 예수원에 주문하면 택배로 보내준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싼 편이지만 꽤 효율적인 기도의자이다. 모양은...음...나무 조각을 디귿자로 이어놓은 것이랄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빡세게 하고 싶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이 저려 집중이 되지 않는 속상함을 완전히 해결해준다. 엉덩이를 받쳐주기 때문에 한 시간은 거뜬히 앉아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 선물 받으면 고마워서라도 일주일은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을까...?
잠이 덜 깬 열두 살 된 개도 어슬렁거리고 따라와, 곧 죽어도 방석 위를 찾아 그 위에 엎어진다. 너무 졸린 나머지 눈도 못 뜨는 개는 엎어진 그대로 신속하게 입신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58년 개띠와 시추 한 마리가 마리서원에 앉아 목하 기도 중이다.
나의 새벽기도는 꽤 복잡하다.
우선, 책꽂이 위로 늘어뜨린 A4 용지 앞에 꿇어 앉아 차근차근 읽어가면서 묵상한다.
그 종이에는 새해 중보기도, 신실한 주님의 자녀 되기 원합니다, 라고 맨 위에 적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실한’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그 단어를 붙여서 쓰거나, 말하거나, 인용한다.
제일 먼저 효과적인 중보기를 위한 원칙 8가지(기도에 앞서 숨은 죄를 회개한 달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없이는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한달지,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랄지 하는)을 읽고, 홍성건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에서 발췌한 중보기도 내용 -너무나도 유니버설한, 일테면 241개의 국가, 2만 4천 족속의 평화에서부터 나라 위정자 등 권세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위하여, 하다못해(죄송합니다만) 선교사와 선교단체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엄청난 범위의- 을 하나씩 성실하게 짚어가면서 묵상한다.
그 다음이 드디어 개인기도.
개인기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중보기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인가 목사님이 기도할 때 늘 자기 기도만 하고 끝내지 말고 자신의 기도는 맨 끄트머리에 하라고 권유하신 적이 있었다. 그 말씀에 감동받은 나는 그 때부터 좋아하는 사람, 친척, 친구, 속도원들을 먼저 넣고 나 자신에 대한 기도는 맨 나중에 하다 보니 15번이 되었다. 이야기 하는 김에 내가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하고 지금 세어보았다. 이름이 적혀있는 사람만 55명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 이름이 있으면 친구 아들, 친구 남편, 친구의 어머니, 이렇게 하다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새벽마다 마리서원으로 몰려오는 것 같아 매우 복작복작해지는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짧게 묵상하며 소원을 말하는 것이 과연 기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나의 한계라면 한계겠지.
어쨌든 A4용지 가득 적어놓은 나라, 민족, 북한, 교회 등등 무생물에서부터 애증이 가득한 인간 군상들의 이름을 숨 가쁘게 부르다 보면 한 시간은 우습게 흘러간다.
다음은 교회에서 나누어진 빠닥빠닥한 책받침같이 코팅되어 있는 ‘속회기도회 기도제목’을 제목읽기 기도로 드린다. 그 내용은 참으로 세밀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리고 수긍할 수 없는 내용도 있지만 그냥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기도한다. 무려 40가지나 되는 기도문은 나를 질리게 하면서 아주 가끔은 ‘대체 이 기도문을 매일 묵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하면서 회의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6시 넘어서야 블랙커피 한 잔 타서 마우스 옆에 얌전히 놓는다.
<숭고한 기도>라는 기도 묵상집을 펼치고 오늘 말씀을 읽는다.
‘기도는 신적 에너지를 무능한 인간 영혼에 전달하는 사슬에서 꼭 필요한 고리‘하고 씌어있다. 주홍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기도할 내용을 본다.
‘...하나님께서 왜 번거로움을 감수하시면서까지 기도를 만드셨을까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쓰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 맞다, 아멘이다!
나는 이 책을 편집한 닉 해리슨의 이름에 뽀뽀를 한 번 해주고 책을 덮는다.
이처럼 영양가 있는 묵상집은 본 적이 없다. 거의 이십년을 매 해 감리교 교육국 출판부에서 발행하는 <하늘양식>이라는 매일 가정 예배서을 보아왔지만, 1/10 정도는 아멘이 나오지 않는,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런 말씀에 아멘하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가정예배서만 보다가 어찌어찌 선물 받은 이 책이야말로 변변찮은 친구 몇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숭고한 기도>를 숭고한 마음으로 읽은 나는 표준 새번역 성경을 펼친다. 요즘은 신약, 그 중에서도 사복음서 위주로 읽어나가고 있다. 올해는 어쩐지 신약에 완전 집중하고 싶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하루 석장 이상을 고수했을 텐데 올해는 장 수 진행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한 장 이상씩만 읽기로 했다.
그래, 요즘 나는 매우 자연스러워지고 자유스러워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나의 허접한 취미 중 그래도 고상한 취미는 성경 읽을 때 밑줄 긋는 것과 성경 읽은 날짜를 적는 것이다. 나는 적혀진 과거의 날짜를 본다. 2003. 8. 23.
2003년이라...나에게 2003년에 대하여 말하라고 한다면 단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소설에 미쳤던 해. 소설을 신처럼 섬겼던 해. 나는 짜안해지는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요한복음 10장을 읽는다.
14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는 형광펜을 들고 생각에 잠긴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것은 알겠다. 예수님이 양들, 그러니까 어리석은 나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을 알아보신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본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 알기는 알겠지, 어느 정도는. 하지만 그 어느 정도 아는 것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 역시 예수님을 보고 단번에 알면 참 좋겠지만 그런 영안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퀘스천 마크를 해놓는다. 나는 왜 이렇게 궁금하고 모르는 것 투성인지 정말 모르겠다.
부탁이 있습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께 조그맣게 말했다. 제발이요. 예수님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들은 시치미를 떼고 출근한다.
내가 슬쩍 물었다.
“그만 둘 것 같더니만 또 출근하네?”
“몰라, 내 뜻은 아니지만 하여튼 더 다녀야 해.”
아들의 퇴직 연기 뉴스를 전해들은 남편이 무지하게 좋아한다.
7시. 맨발에 운동화를 꿰차고 나간다. 집 근처 하천 변 조깅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왔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는 천변의 조경은 끝내준다. 좀 빠르게 걸으면서 중얼중얼 기도도 몇 마디 했다가 멍청하니 물소리를 듣기도 하면서 한 시간여를 보냈다. 내일부터 비가 억수로 온다니 당분간 하천 산책은 못할 것 같다. 아쉽구나.
8시 40분. 집을 나서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출발. 수요일에는 교회를 간다. 오전에 있는 키노르 중창단 연습, 속장 교육. 그리고 저녁에는 수요예배와 성가연습이 있다.
전철에서 김선우 시집을 읽었다. 다음 주 수요일 독서회에서 토론할 책이다.
반쯤은 알아듣겠는데 난해한 시가 많다. 단번에 접수가 되지 않는 시는 두 번 읽는 성의도 보이면서 나름대로 정성껏 읽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는 영풍문고에서 단지 그 제목에 넋이 나갈 정도로 끌리는 바람에 덥석 물어왔다.
제목만 몇 번 읽었음에도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이면 자신의 몸속에 넣고 사는지.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시 한 편 때문에 가슴이 잘잘 끓는 가운데 교회 마당에 들어섰다.
나는 늘 교회를 일찍 가는 편이다.
오늘도 시간이 삼십여 분이나 남아서 지하 기도실로 들어갔다. 작은 개인 기도실에서는 엷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늑하고 감미로운 소리다.
아마, 새벽기도를 마친 교인이 낮 시간의 교육 때문에 집에 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살짝 잠이 들었나보다.
십자가를 비추는 불을 켜고 -나는 지하 기도실에 들어가면 꼭 십자가 불을 켠다. 그래야 기도실에 온 거 같으므로- 방석 하나 갖다 놓고 그 위에 오토마니 앉았다.
비로소 예수님과 마주 앉은 기분이다.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예수님, 오늘은 오목 한 판 어때요? 하고 농담이 하고 싶어질 만큼 기분 좋은.
이상하게도 내가 기도실에 들어갈 때면 기도실에는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없어서 정말 좋다고 말하면 예수님이나 목사님이나 좀 껄쩍지근하시겠지만 텅 빈 기도실이 너무도 좋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이 시간이 정말 좋다. 그냥 가만히 십자가를 보면서 앉아있는 시간.
가끔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하나님’ 혹은 오강남 교수의 조언대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기도문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의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이다.
요즈음은 기도실에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자주 있다. 글쎄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 주일 전인가? 그 때도 일찍 와서 이곳에 앉아 가만히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글쎄 흐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이야!
나는 ‘울고 있는’ 내 자신에 너무도 놀라 잠깐 동안 내가 정말 나인가,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 현실인가, 꿈은 아닌가, 하는 요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느 순간 가슴이 축축해지고, 내 자신이 개미보다도 작아지고, 허물 많던 과거지사가 휘리릭 내 망막을 스쳐가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그치질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감기도 안 걸렸는데 말간 콧물마저 쉴 새 없이 흐르니 그것도 참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참으로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시려는구나, 하는 확신이었다.
그 때 이후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소소하게 갈등 때리던 문제들이 머릿속에서 어디론가 출행랑을 쳤는지 도무지 문제점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도실을 즐겨 찾기는 했지만 기쁨과 확신을 가진 적은 (별로)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것 보다는, 내가 무엇인가 잘 못하면 여지없이 끄집어내어 낱낱이 광명한 대낮에 펼쳐놓으시는, 어찌 생각하면 몰인정한 신으로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아이구야, 또 걸렸구나, 된통 혼날 일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 동안 죄의식을 많이 가지고 살아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재대로 살지 못한다는 죄의식,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나로 하여금 주눅들게 해서 섣불리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눈물 사건 이후로 나에게 어떤 평안이 감돌게 되었다. 그것은 확신에서 오는 안식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생각하신다, 그런 확신 말이다.
그 후, 나에게 기쁨이 찾아왔고,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고,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나는 또 나의 신앙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0분 정도 그렇게 오롯하게 평안을 누리고 조가 중창단 연습 한 시간.
열 댓 명의 대원 중 오늘은 반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끔 그렇게 꽝일 때가 있다.
소수의 인원이지만 그래도 성의껏 연습했다. 조가 중창단은 교회에서 장례가 났을 때 입관예배나 장례예배, 하관예배 등 때 참석하여 조가를 불러주는 중창단이다. 노래 솜씨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꼭두새벽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동서남북에서 달려오는 ‘성의’ 점수는 가히 A+를 주어야 할 듯.
그 후 한 시간 동안 속장 교육.
*속장: 감리교에서 활용하는 셀 모임으로 지역에 따라 5~10명 정도로 속을 나누어 일주일에 한 번씩(대개 금요일이다) 가정을 돌아가면서 모여 예배하고 친교를 나누는데 그 중 예배를 인도하고 속회 전반에 걸친 심방, 연락 등을 맡아한다. (나는 속장의 직분을 십 오년 정도 맡아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교회는 담임 목회자가 교체되었다. 28년 동안 목회했던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하여튼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으로 이전과는 체제가 많이 달라졌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지만 올해는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이 속장의 리더십에 대하여 30분 교육하시는 데 내용도 좋고 공감대도 형성되고, 나름대로 결단할 마음도 생기는데 문제는 그 후, 부목사님이 인도하는 속장 교육이다.
원래 감리교는 속회 인도를 위한 공과 책이 교재로 나와 있다. 이전에는 담임 목사님이 친히 속장 공부를 인도했는데 속회 공과에서 알 수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많은 것을 보충해 주어서 참으로 유용했고, 속회 인도할 때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는데 이번은 꽝이었다.
역시 두 달 전 새로 부임하신 부목사님은 속회 공과 내용을 거의 그대로 요약 설명해 주는 것이다. 게다 불행히도 부목사님의 스타일이 나에게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선입관을 갖기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부임 첫 번째 설교부터 실망을 했는데 불행히도 그 실망이 계속 ‘진행’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쩐지 허공을 떠도는 것 같은 말씀. 나는 그 허공을 떠도는 말씀을 하나라도 건지려고 매우 노력하지만 가슴이 타고 진땀이 솟는다. 나는 주문을 외우면서 속장 공부를 견디고 있다. 인내하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 그래, 인내! 목사님을 견디고, 목사님의 말씀을 잘 견디어야 하느니라...
속장 공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옴. 내심 이유가 있었다. 비가 살살 오기 시작하므로 저녁 성가연습 때 간식으로 부침개를 만들어 갈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자마자 팔을 걷어 부치고 부침개 열 장을 만들었다. 재료를 한 번 소개해 드릴까요?
부침가루 1킬로. 계란 두 개(보통 한 개만 넣는데 오늘은 두 개 넣었다), 호박, 부추, 감자, 풋고추, 홍당무, 양파, 깻잎...
그 중 한 장을 부쳐 경비실 갖다드렸다. 경비 아저씨 입이 쩍 벌어지면서 너무 좋아 하신다.
네, 네. 맛있게 드세요~
6시. 자, 이제 다시 교회를 향하여 출발이다. 따스한 부침개 쟁반을 싼 보자기를 가슴에 품고 말이다. 7시 반 수요 예배와 9시 찬양 연습을 위하여 출발~
수요예배,
비가 와서인지 평소보다 교인들이 많지 않아 보인다.
언제 오셨는지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담임 목사님이 안쓰러워 보인다. 이럴 때 정말 힘이 빠지실 거 같다. 나라도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얼마 전, 그 날도 비가 오는 수요일 저녁 예배였는데 빈자리가 꽤 많았다. 그 모습을 보고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비가 오는 수요일 저녁 예배에 오신답니다.”
우하하!
늘 그렇듯 예배당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십자가만 보이는 그 곳이 정말 좋다. 예배 시간까지 이십 여분을 가만히 앉아있는데 또 눈물이 쏟아졌다. 요즘 이런 기이한 현상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이 내 가슴을 이리 쓸어내리고 저리 쓸어내리면서 눈시울을 젖게 만드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펄펄 뛰는 부흥회도 아닌데, 무슨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냥 예배당에 앉아있기만 해도 -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오전의 부목사님이 아닌 다른 부목사님의 설교.(교회에는 부목사가 참 많기도 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한 달 동안 시리즈로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전부터 논리적 설교로 정평이 나신 목사님의 설득력 있는 이론 전개에 계속 끌려가는데 결말이 정말 압권이었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신뢰하라.
2. 그 뜻을 분별할 수 있음을 믿고, 잘못 분별함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7월 한 달 동안 진솔한 일기를 쓰는 것에 매진하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나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의 커밍아웃을 통해 나와 비슷한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영양가 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의지를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실지 나는 그것이 의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수요 예배에서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해답을 찾았다.
100킬로 가까운 거구의 목사님께서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어조로 하신 말씀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여러분이 잘못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시 잘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으십시오.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할렐루야!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담임 목사님의 말씀도 더불어 떠올랐다.
“예배드리는 중에 복잡하게 얽혀있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말씀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어쩌면 7월 한 달 내내 일기 작업을 하면서 마음 찜찜해 할 그 염려를 이렇게 초기에 간단히 진화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배 후, 문 앞에 서 계시는 목사님께 다가가 오늘 주신 말씀으로 나의 문제가 해결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부족하여 망설이다 말았다. 언젠가는 꼭 말씀드려야지!
예배 후 지하 홀로 갔다. 찬양 연습까지의 30분 정도의 공백시간에 식사를 하지 못한 대원들을 위하여 김밥과 컵라면, 그리고 차를 마련해 놓은 테이블이 구석에 마련되어 있다. 내가 부스럭거리면서 뭔가를 꺼내니까 대원들이 벌써 알아차린다. 가끔 부침개를 만들어오는 것이 내 취미인 것을 알고 있는 눈치 백단인 우리 대원들!
“권사님, 혹시 비오니까 부침개 또 만들어 오신 거 아니에요?”
부침개 보따리를 풀어놓자 소리 지르는 대원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나는 성가대실로 가서 찬양곡집을 공부. 성가대실에는 이미 지휘지 선생님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내가 좋아하는 ‘신실’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실하신 우리 지휘자 선생님은 아무도 없는 성가대실에 홀로 앉아 열심히 악보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나이야 나와 띠 동갑은 될 정도로 어리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난다.
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찬양연습. 그 시간, 감히 나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매일 찬양만 하고 살아도 좋으리...
집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혹시 내가 부침개 만들어가니까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시고 해답을 빨리 주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나의 스토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일 - 비전 (0) | 2011.06.23 |
---|---|
5일 - 반성모드 (0) | 2011.06.23 |
4일- 독립기념일 (0) | 2011.06.23 |
3일 - 그분이 오셨다 (0) | 2011.06.23 |
한 달의 일기 제 1일 (0) | 2011.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