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 그분이 오셨다
새벽에 일어나 중보기도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온갖 경로를 거친 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형광등이 켜졌다. 간만에 목요일이 비는데 기도원에 갈까...?
내가 다니는 교회 장로님 부부가 세운 기도원이 철원에 있다 기도원 버스가 바로 우리 집 앞으로 지나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기도원에서는 목요일마다 낮 집회가 있다. 목요일은 도서관에서 수필 강의를 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기도원에 가지 못했다. 기도원 출입도 중독 기가 있는지 모르지만 몇 달 가지 않으면 슬슬 좀이 쑤셨다. 기도원 간다고 해서 남들처럼 목청껏 통성기도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자리가 좋은 것이다. 두 달 전, 5월 1일 노동절이 바로 목요일이었다. 해서 간만에 남편과 믿음의 동역자인 친구, 거기다 간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까지 모조리 다 모시고(?) 기도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날을 곰곰이 되씹어 보니 고개가 갸웃해진다. 기도원에 갔다 오기만 하면 성령 충만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 날, 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금연을 깬, 기록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노동절 그 때 기도원 갔을 때 마침 우리 교회에 부임한 담임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는 바람에 꿩 먹고 알 먹고가 되었다. 영성 짱, 말씀 짱이니까 시험들 걱정이 없는 것이다.
기도원 집회를 참석하다 보면 수많은 부흥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는데 은혜로운, 아니, 은혜는 둘째 치고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여기에서 ‘올바른’의 기준은 성경말씀에 근거한다) 목사는 다섯에 하나, 아니 완전 솔직하게 말한다면 열에 한 사람 찾기도 힘들었다. 물론 나와 우리 남편의 사견임을 밝혀둔다.
60년대식의 쉰 목소리로 윽박지르고 호통치고 상소리 대놓고 하고, 좋은 차 자랑하고, 헌금 많이 내서 축복받은 성도들의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다.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겨야 한다, 라는 말씀은(그게 과연 하나님 말씀인가?) 부흥목사들의 십팔번이다.
몇 번 기도원에 간 나는 부흥사의 말씀에 은혜 받으려는 욕심을 자연스레 포기했다. 자기 흥에 겨워 삼천포로 마구 빠지는 부흥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비애감마저 느껴야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 같은 목사보다 그렇게도 영양가 없는 설교에서 아낌없이 아멘하고 박수쳐 주고 즐거워하는 기도원파 신자들의 믿음이 더 좋지 않은가!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 그레고리 루이스가 썼고 이중수가 번역한 귀하고도 귀한 책. 원 제목은 <IS GOD FOR SALE?>1979년에 미국에서 초판이 나왔는데 부제에는 ‘70년대 미국 교회를 향한 현대 교회의 자성적 검토’이다. 뒤표지에는 이런 글도 적혀있다.
-하나님도 바겐세일인가?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들의 포켓이나 우리들의 교리나, 교단 신학이나 기타 갖가지 교회 운영 방식의 도표 속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 하나님이 신비하시고, 탐색될 수 없으며, 무한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사랑과 모든 능력을 가지신 창조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이후의 모든 성도들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야 한다. 아니오, 하나님은 바겐세일이 아니오!-
바담 풍 해도 바람 풍으로 알아듣고 열심히 아멘, 하는 기도원 골수분자를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어쩌면 나는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 좋은 신자들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러 가는지도 모른다. 찬양 인도하는 전도사가 심한 비브라토로 세상 창가 비슷한 창법으로 찬양을 인도해도 좋다. 오전 집회 끝나고 점심 식사 후 한 시간여의 남는 시간, 주변을 돌아보거나 일찍 성전에 들어가 앉아 고요하게 침묵하는 시간도 참 좋다.
어쨌든 기도원 간지 두 달이 넘었겠다. 마침 지난주에 봄 학기 종강도 했겠다, 나는 슬슬 발동이 걸려, 늦잠을 즐기는 남편을 깨워 살살 꼬드겼다.
“바람도 쐴 겸, 내가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니까 이번에 같이 가보자아~~”
그렇게 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질렸던 과거가 있어서 급작스레 이루어진 번개를 좋아한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일인지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은, 음... 진정한 연애를 못해 본 사람이다!
헌데 기도원 버스 기다리는 곳에 도착하니, 어머나? 노동절에도 같이 기도원에 같던 내 믿음의 동역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 자기, 어쩐 일이야? 어디 가려고?
친구:(약간 멍한 표정으로) 기도원 가려고.
친구도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를 기도원으로 끌고 같이 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 친구가 나에게 (감히, 내가 소개시켜 준 기도원인데!) 연락도 하지 않고 혼자 기도를 하러 가려고 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친구 왈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기도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든 남편과 아들을 깨우지도 않고 살며시 집을 나와버렸다나!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동역자가 틀림없는 가보다. 영으로 통했으니 말이지...”
이리하여 기도원에 도착할 때까지 친구와 나는 버스 안에서 번개 부흥회를 했다. 영적으로 맞는 친구,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축복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 집회에 온 목사는 별로였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을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느낌까지 숨길 수는 없지 않나?) 교회 짬밥이 삼사십 년 되다보니 한 오 분 정도 설교를 들으면 대충 감이 온다.
미국에서 수십 년 살았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말의 템포는 너무 느렸고, 한 마디 하면 누가 들어도 열 마디 이상은 빤히 알 수 있는, 그러므로 결말을 상상할 필요가 없는 FM식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인생도 그러하지만 끝을 알고 들어야한다는 것은 참 고역이었다. 게다가 그 끝이 금방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엿가락처럼 있는 대로 늘여서 한참을 질질 끌고 갔다. 아, 이런...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정성을 다하여 설교하는 모습과 교만하지 않고, 무엇보다 딴소리, 객쩍은 소리가 전혀 없이 진실하여 점수를 덜 깎였다.
일단 기도원에 왔으면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받으려는 의지가 있으므로 나 역시 최대한 아멘으로 화답했다. 은근하게 지루한 설교였지만 말이다.
나는 내 오른쪽에 앉은 남편과 내 왼쪽에 앉은 친구를 교대로 살짝 살짝 관찰했다.
오른쪽은 시큰둥한 표정. 왼쪽은...? 은혜 충만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하도 신앙책, 신학책, 성경, 주해서를 많이 읽어 척 하면 삼천리이고, 옳고 그름이 너무도 분명하여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이며, 교회이건 목사이건 유명설교자이건 간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아니다, 하고 주장하며 일목요연하게 타당한 논리를 펼치던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한 친구가 저렇게 어눌한 설교에 얼굴이 벌개지도록 영성에 충만해 보이는 것이었다. 오전 집회 끝의 기도시간에는 코까지 훌쩍이며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니 말씀보다 그 친구의 모습에 오히려 감격했다. 그 모습에 은혜 받은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눈물도 전염이 되는지, 아니면 요즘 나의 눈물기도 버전이 다시 리바이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또다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이었다. 티슈도 닦고, 손등으로도 훔쳐내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몸속에 꽉 차 있던 괴로움, 아픔, 상처, 슬픔 덩어리들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카타르시스! 기도 시간이 되면 제 일착으로 뛰쳐나가던 남편도 꽤 오랜 시간 앉아 있는 모습도 신기했다.
점심으로 기도원에서 가꾼 무공해 상추, 호박, 고추 등과 제육볶음을 먹었다. 아욱 된장국이 정말 시원했다. 다른 기도원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기도원은 점심을 무료 제공한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생일이니, 진급했느니, 은혜 받았느니, 치유 받았느니, 하면서 잘 차린 뷔페로 한 턱 쏘는 신자들이 심심찮게 많아서 먹거리가 화려하고 풍성하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에게 대접하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음식은 기도로 양념을 해서인지, 아니면 무공해 야채와 더불어 먹어서인지 정말 맛있다. 얼핏 들으니 기도원 점심은 일 년인가 이 년을 어느 권사님이 사비를 들여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다. 진짜 대단하신 분들이다. 농사짓는 분들은 감자며 야채며 곡식 등 추수한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다고 들었다. 나누고 베풀고 함께 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이런 것이리라. 늘 대접만 받는 우리 일행은 그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뻐근해졌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기도원에서 한 턱을 내리라, 굳은 결심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아멘, 옆에서 남편이 즉시 도와주었다.
점심 잘 먹고 마무리 공사 중인 대성전 신축공사장도 가서 감독하고 잘 보냈다. 오천 석 규
모의 성전이 웅장했다.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느꼈다.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회복하기를!
일찌감치 성전에 들어가 좌정하고 앉았는데 문자가 왔다. 문인협회 회원이었다.
'시간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문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인들과의 술자리는 참 즐겁다. 글
에 목숨을 걸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사사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 철학, 문학, 시, 책, 마음, 사랑, 그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대화의 재료가 되어 깊은 맛을 내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 또한 소설에 대하여 입에 침을 튀기면서 좌절에 대하여, 욕망에 대하여,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나의 (우라질)손목에 대하여 떠들어댈 것이고, 서로 나누는 술잔에는 얼마나 많은 기쁨이 흘러 다닐 것인가.
하지만 나는 이번 달에는 소설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는 결심이 있었다. 절대 소설에 눈 돌리지 않고 일기나 성실하고 진솔하게 적자, 하는 것.
내 심중을 알아차린 친구는 모처럼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했고 그렇게 저녁 번개를 만들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답 문자를 보냈다.
‘저녁 약속이 있네요. 죄송.’
그제야 한 숨 돌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후배 문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샘, 오늘 밤 9시쯤 만나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 유혹은 겹쳐서 오는 것일까?
‘봐서 전화하마.’
버스 안에서 친구와 부흥회 계속하는데 전화가 왔다.
거의 일 년 만에 싸부님이 전화를 한 것이었다.
싸부님은 나를 소설의 길로 인도해 준 분으로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내일 오너라.”
“네?”
“내일 출판기념회 한다. 누구, 누구(두 사람 이름 대면서) 연락해서 같이 오너라. 보고 싶다.”
나와 58년 개띠 동갑인 싸부님은 다정하게 이말 저말 하시더니만 번개 미션을 주는 것이었
다.
아, 내일은 금요일. 겟세마네 기도회가 있는 날. 하지만 싸부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소설과 멀어지려고 하면 이렇게 갑자기 싸부님이 전화도 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일단 항변성 화살기도를 했다.
이것은 절대로 나의 의지가 아니거든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원래 하나님은 과묵하시니까. ^^
결국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저녁을 먹었다.
저녁만 먹었을까.
내가 술 잘 마시는 줄 아는 친구 남편은 소주 한 병을 처음 딸 때마다 '11조 떼어야지'하면서 내 잔을 듬뿍듬뿍 채워주었다.
* 먹는 것의 11조: 믿는 사람들끼리 통용되는 언어인데 예를 들면 우리 남편이 찰떡 아이
스바를 먹으면 내가 달려들면서 말한다.
"11조 떼어야지!"
그러면서 한 입 뺏어 먹는다.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도 먹던 것을 나누어 던져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야, 너도 11조 먹어라."
만난 지 20년 된 친구 남편은 이제 너무 친해져서 얼마 전 내가 술 끊었다고 하니까 거짓말 작작 하라고 꿀밤을 때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직업에 대하여 관대한 경향이 있다.
소설가는 교회에 다녀도 술 담배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니까. 작가니까.
나는 대단한 특혜를 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면죄부가 아니다. 어딘가 통계 자료가 있겠지만 한
국의 개신교도 중에서 주초잡기를 아직 끊지 못했거나 끊을 의사가 없는 사람과, 그리고 교
회를 다니고 싶지만 주초잡기를 금하였느뇨, 하는 교리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섣불리
교회 마당을 밟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당당한 변호이다. 술 마시는 것이 죄라면 신부님들은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죄를 많이 지으시니 말이다. 담배 피우는 것이 죄라면 신부님들은 어떡하느냐고요! 가톨릭 교리서를 뒤져서 신부님의 주초잡기가 어떻게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 정말 알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첫 잔이 달콤했다. 술을 마셔본 사람은 그 맛을 안다. 첫 잔을 입에 대었을 때 그 날 술 발(술빨이라고 세상에서는 말한다)이 어떻게 되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어느 때는 첫 모금조차 목구멍 넘기기가 힘들 때가 있고 -그럴 땐 오늘은 술이 잘 받지 않네, 하는 대중적인 언어로 이야기한다, 오늘처럼 사이다 마시듯 거부감 없이 달착지근하게 술술 넘어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오늘 술발 받는다, 고 말하면 다 알아듣는다.
돼지갈비를 안주로 술빨이 받은 나는 제법 술 좀 마시고, 와하하, 진짜 즐거운 시간을 가졌
다. 이럴 때 기분 최고 좋으신 분들은 역시 남편님들! 마누라 옆에 앉혀놓고 술 한잔 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낙이라고 여기시는 순수하신 분들.
"이럴 때는 이차를 아니 가고는 못 배기리."
모두 기분이 업 되었으므로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몽땅 빈대떡 집으로 진격! 막걸리에 빈대떡으로 술빨 완전 충만해졌다. 약간 걸음이 비틀거리는 남편을 억지로 택시 안에 구겨 넣고 집으로 왔다.
8시 반. 남편은 그대로 기절 비슷하게 뻗어버리고, 나는 소설 쓰는 후배 문인에게 문자를
날렸다.
‘9시에 단골집으로 오너라.’
‘넵!’
아들 방에서 엣쎄 한 갑을 훔치고 라이터도 좋은 거 하나 꼬불쳐 가지고 선술집으로 갔다.
이후, 후배 문인의 남편이 후배의 사랑하는 아들 손을 잡고 선술집까지 찾아올 때까지, 두 시간 넘게 앉아서 소설에 대한 집중 탐구 했다.
술은 많이 마셨으므로 계란말이 하나 놓고 차가운 콩나물국만 디립따 들이키면서 하소연조의 문학토론. 후배 문인도 여선교 회장을 할 정도의 신앙인이므로 종교와 문학을 동시에 토로할 수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이기는 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후배의 가족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화끈한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의 열 오름은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벤치를 보자 그곳에 주저앉아 아주 편안하게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으되, 참았다.
오늘, 그 분이 오셨다.
그 분이 오시긴 오셨는데 저녁에 오신 그 분은 또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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