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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20. 터키 국경을 넘어 그리스로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랍쉐키 항구로 이동해서 버스에 탄 채 카페리에 올랐다.

유럽 쪽의 터키로 가기 위하여 다나넬스 해협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배를 타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40여분에 불과한 짧은 항해이지만 에게 해를 건넌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게다가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흥분되는지.

각국의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선실에서는 장사꾼들도 몇 있었는데 멋진 터키 남자는 한국말을 해서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원 달라 한 개, 두 달라 세 개, 만들기 재밌어요, 이런 식이다. 재미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분으로 몇 개 샀다. 가지고 놀 어린애도 없는데 왜 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배를 타면 절대 그냥 있지 못하는 나는 선실의 카페에서 커피도 사마시고 모처럼 순례자들과 이야기도 나누다가 기어이 갑판으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장난 아니었지만 망토를 꼭 붙들고 그 바람을 견디는 기분도 상쾌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배를 따라오는 장면도 한국의 어느 뱃길과 다를 바 없었다. 갈매기들이 살이 통통하게 찐 것도 한국의 갈매기들과 똑같았으니 사람들이 갈매기의 버릇을 나쁘게 들여놓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중에 나도 빠질 수는 없겠다. 가방에 있던 모든 먹거리를 에게 해의 갈매기들에게 헌납했으니 말이다.

 

건너편 항구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불쌍할 정도로 빈약한 점심이었다. 단체 관광객들인 우리들은 식당의 홀을 지나쳐서 식당 뒤통수에 붙어있는 널찍한 뒷방으로 안내 되었는데 단체 관광객만을 모시기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예감이 별로였는데 과연 메뉴에도 없는 엉터리 음식들이 빠른 시간에 차려졌다. 구운 고등어 반 마리, 버터로 볶은 밥, 사과 한 개, 그리고 매일 먹는 홍당무, 양배추, 흑채로 뒤범벅된 야채. 그리고 끝이었다.

음식이 너무 빈약하다거나 성의가 없는 요리라거나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식당 메뉴에 적혀있는 오리지널 터키 요리를 먹고 싶은 나머지 심통이 난 나는 개밥 같은 식사를 반 이상 남겼지만, 너무 일찍 일어난 순례자들은 모두 맛나게 드시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별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라도 번듯하게 테이블 크로스가 덮힌 식당 테이블에 앉아 터키 현지인처럼 메뉴를 골라 한 상 푸짐하게 차려먹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하므로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좀 우울해졌다.

 

다른 순례자보다 발 빠르게 식당 밖으로 나갔다.

뛰쳐나갔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실은 골목 구석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싶었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짐짝처럼 우리를 처넣은 식당 구석방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슬렁거리며 항구의 골목을 걸었다. 국제 미아가 될까봐 멀리가지는 못하고 목줄이 길게 매달린 개처럼 근처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내 몸통만한 빵이 진열장 천정까지 가득 차 있는 빵집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저런 빵을 대체 언제 먹어보고 터키를 떠난단 말인가. 저런 빵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터키를 떠나야 한다는 이 현실을 믿기 싫다, 그렇게 속으로 아우성치면서 식당 앞에 있는 리어카 행상인에게 터키 땅콩을 한 봉지 샀다.

리라도 아니고 달러도 아니고 유로화만 고집하는 상인의 얄팍한 상술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아직은 많이 가난한 터키에 보시(이런 단어 쓰면 참 민망하지만 딱 들어맞는 말이어서 쓰지 않을 수 없다)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지불했다.

나에게는 터키 공항 화장실에서 누군가 쥐어준 유로화가 제법 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지는 못할망정 땅콩 값으로 지불하는데 어쩌겠나. 비록 바가지임은 분명하지만. 나는 당신이 술수를 쓰는 것은 절대 모르는 여행자입니다하는 아주 순진한 표정으로 탱큐를 연발하면서 땅콩 봉지를 받았다. 속아주는 재미를 알 리 없는 땅콩 장수는 자신의 상술이 먹혀들어갔다는 것이 너무 좋은지 내내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항구의 이별.

드디어 우리는 오래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멋진 버스와 이별했다. 터키 여행 내내 능수능란한 터키어를 뽐내고 박학다식을 뽐내고 자신의 폭넓은 신앙을 뽐냈던 선교사 가이드와도 (잠시 동안이나마)이별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 여행을 끝내고 아테네 공항에서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다시 픽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신혼의 단꿈을 접고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했던 하산도, 나의 트렁크 밀대를 박살내고 얼기설기 테이프로 땜빵해 주면서 틈만 나면 팔이나 어깨를 슬쩍 만지면서 애교스런 성희롱을 했던 운전기사와도 이별이었다.

그리스 국경을 넘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새로운 버스와 그리고 그리스를 안내해 줄 새로운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선교사와의 이별은 아쉽지 않았지만 버스와의 이별은 아쉬웠다. 나에게 매우 만족을 선물했던 버스를 애인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마웠다. 비록 버스 안의 화장실은 한 번도 출입하지 않았고, 그토록 기어들어가고 싶었던 계단참에 있는 침대에도 누워보지도 못했지만 나의 지정석은 애인의 무릎처럼 늘 아늑했으니까.

드디어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는 기분은 묘했다. 어딘가에서 어딘가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사람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기분은 마치 나는 변하지 않았음에도 무엇인가 변화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이동하기 위한 작은 버스를 타고 기다렸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으므로, 이런 시를 어디에서 읽었을까. 어차피 길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몇 개국의 나라를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북한이 길을 개방한다면 이곳에서 길을 따라 한국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그리스 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단체 여행의 이점인지는 모르지만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마저 생략되어 있었다. 전쟁이 없는 나라들은 이렇게 편하게 사는가 보다.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난 그리스 입국수속에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국내선 탈 때보다도 편리한 국경 넘기였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고고학 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아름답고 지적인 멋쟁이 가이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가이드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6억짜리 벤츠 버스였다. 내부는 그야말로 럭셔리, 그 자체였다. 그레이 가죽 시트는 평창동 고급빌라 거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터키에서 애용한 버스도 정말 쾌적했는데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가이드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버스라는 말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다리가 진짜 국경이었다. 반은 빨간 색의 난간이 칠해진 터키, 나머지 반은 하늘색의 난간이 칠해진 그리스. 매혹적인 선홍빛의 터키의 국기가 가로등마다 나부끼고 있었는데 다리 중간에 이르자 포근한 느낌의 하늘색 국기가 온화한 표정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길은 이어져 있고, 산과 들 모두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금을 긋고 내 땅, 네 땅하고 지지고 볶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질없는 소유욕 때문에 역사 이래로 그토록 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이리라.

명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박사 출신 가이드는 한눈에 보아도 지적 카리스마가 넘쳤다. 아닌 게 아니라 명문대에서 강의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똑똑했다. 당당하고도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다시 그녀의 인생 여정이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에서 살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관광 가이드를 하게 되었을까, 너무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왜 교수나 법관이 되지 않고 그리스에 머물면서 가이드를 하는 것인지. 세상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의 운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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