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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21. 네아폴리스(마케도니아)의 첫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어두워지기 전에 까발라에 도착해야 하므로 버스는 속력을 냈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은 마케도니아, 헬라 지명으로는 네아폴리스라 불리는 해변 도시다. 두 시간 넘게 그리스의 풍광을 보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터키의 어느 곳을 가든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한국의 교회당처럼 솟아 있던 이슬람 사원이 보이지 않고 대신 교회가 눈에 띄는 것이 신기했다.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는 그리스와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터키는 사이가 아주 나쁘다고. 바로 인접한 국가이면서도 한일관계처럼 소 닭 보듯 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해는 졌고 어둠이 짙어가는 네아폴리스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르기도 전 어둠이 내린 성 니콜라우스 교회의 도착기념비 앞에서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총천연색 벽화가 화려했다. 이천 년 전 바울이 헬라 땅에 도착한 기념비 앞에서 우리 순례자들도 도착했다는 의미의 인증사진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그리스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호텔은 아늑했고 최고였다. 나에게는 그랬다. 아이발릭 호텔에서 추운 밤을 보낸 순례자들은 히터가 잘 되어있는지만 확인했다. 솔직히 말해 너무 추운 밤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에서의 첫 호텔은 고풍스러운데다가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나의 엔틱 취미가 다시 발동하려는 참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식 건물보다는 조금은 불편해도 낡고 오래된 건물은 그 자체로 이미 나를 만족시켜 주는 무엇인가 있었다. 낡음 속에 숨겨진 역사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맡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매력적인가.

호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엘리베이터였다. 자동으로 열리는 여느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마치 현관문처럼 여닫이문이 달린 재미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똑똑 노크라도 해야 문이 열릴 것 같은.

게다가 깜찍하고 귀여운 룸이라니!

파스텔 톤의 진홍색 시트가 깔려있는 작고 앙증맞은 침대(룸이 그다지 크지 않아 큰 침대는 트윈으로 비치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무 냄새가 그윽한 루바 창을 열면 발코니로 나갈 수도 있었다. 트렁크를 내려놓자마자 발코니로 달려갔다.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신선한 느낌. 간간이 내리는 비를 그냥 맞았다. 그 기분마저 상쾌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가는 빗줄기가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간간이 사람들이 찻집에 들어가거나 상점을 나오는 모습,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영화처럼 아련해 보였다. 길 건너편의 서민 아파트로 보이는 작은 창 불빛이 따뜻해 보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다.

 

방까지 찾아와 작은 비누를 주고 간 권사님이 있는데, 예순 세 살이라나, 그것이 꼭 선물의 뉘앙스는 아니라는 룸메이트 왕언니의 조언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인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거래는 있을 수 있겠지만 수요자가 먼저 공급자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난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예수님 시대에서 채찍을 맞았던 성전의 장사꾼들과 무엇이 다른가?

호텔 2층 식당에서 가자미 구이를 메인으로 하는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 입구 로비는 푹신한 소파가 있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한 구석의 소파에 모여 앉은 외국인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정장을 입은 회사원 분위기인데 무슨 간략한 회의를 하는 모습이었다. 동 서양을 불문하고 지적인 냄새는 누구나 맡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의 표정은 신중했고 러시아의 콘트라 옥타바처럼 낮은 목소리는 품격이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스의 고풍적인 느낌과 더불어 그들의 모습은 멋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열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던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홀려서 바라보았다. 룸메이트 왕언니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멋진 거야!”

몰입의 매혹은 나이와 전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식사 후 바닷가로 저녁 산책을 나갈까 했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진홍색의 침대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모처럼 왕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회에서 사람들과 친해지면 꼭 당하는, 그 사소한 불만과 시기와 시험들. 모두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모인 사람들이니 얼마나 허물이 많을 것인가. 그 속에서 부딪치며 사랑을 배워나가는 길고 긴 과정이 교회 생활에서 빼 놓을 수는 없으리.

어디서나 사람들이 모이면 불화와 타협과 신뢰와 애증 그런 모든 것들이 엉켜서 하나 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루지 않겠는가.

내가 이제껏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람들과 많이 친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왕언니의 리얼 스토리를 들으면서도 내심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려고 했지만, 마음뿐이라는 것을 내 자신은 안다. 늘 겉돌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혀 힘들거나 싫지 않다. 오히려 살갑게 대해주고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뒷걸음쳤을지도 모른다.

순례자들은 나를 작가랍시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하기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많이 배려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참 고맙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상태의 내 위치가 차라리 훨씬 마음이 가벼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발코니로 나가 밤이 깊어가는 네아폴리스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 아파트의 불빛이 많이 사라졌다. 거리의 행인도 드문드문하다. 상점의 불빛이 어느 순간 꺼지면서 어디서나 사람이 살고 있고 희로애락이 있다. 어느새 여행의 반이 훌쩍 지났다. 이제 세 밤만 자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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