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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19. 트로이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여행 중에 맞이하는 주일은 남달랐다.

순례자 모두는 교회에 관한한 둘째라면 서러울 열성분자들이었기에 모두들 한국에서의 정겨운 예배당을 떠올리며 한담을 나누었다. 고향 같은 교회다.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결코 마음은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 품 같은 곳.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다. 준비에 철저한 집행부에서는 마치 주보처럼 예배 순서지까지 이미 프린트해 오셨다. 대단하신 분들이다.

오늘 그리스로 넘어간다고 하니 가슴이 설렜다. 더구나 그 유명한 트로이 유적지를 들릴 예정이니 가슴이 뛸 만도 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고, 호머의 서사시에 오르내린 신화와 전설의 트로이. 트로이라는 지명만으로도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트로이는...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를 경유하여 드디어 트로이에 도착했다. 이름까지 그럴 듯한 트로이였는데, , 이를 어쩌나...

어린애도 알고 있는 트로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너무도 초라한 유적지였다. 한국의 이름 없는 명승지만도 못한. 게다가 유치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는 트로이 목마 조형물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솜씨 좋은 한국의 장인을 불러 몇 달 뚝딱거리며 만든다고 해도 저렇게 초라하지는 않으리.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으려니 화가 날 정도였다.

다행히 목마 옆의 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항아리가 세월의 흔적을 담뿍 안고 있어서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도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앞에서 사진을 안 찍을 수는 없어서 몇 장 찍기는 했다. 현상해서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릴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낙천적인 다른 순례자들은 목마 다리사이(딱 그 부분)에 세워진 계단을 올라가 목마 가슴에 뚫어있는 네모난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계단을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창문마다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드는 순례자들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트로이 유적지 발굴 현장은 볼 만했다.

나는 땅속을 파헤치고 그 속에서 도시를, 절을, 사원을, 주거지역을 발굴하는 현장을 보는 것이 일종의 취미였다. 땅 속에 파묻힌 시간의 위대함을 사랑한다고 할까. 오랜 세월 묻혔던 구조물들이 다시 햇볕 아래 드러날 때의 경외감을 사랑한다고 할까.

맨날 뒤쳐져서 혼자 놀거나 딴청 하는 바람에 들을수록 유익한 선교사 가이드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뺀질이 나는 간만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물론 들을 때만 감동하고 뒤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는 역사와 신화 이야기였지만.

언덕의 전망대 계단을 오르는데 순례자 한 분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라고 해서 웬 일인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갑자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보기가 너무 좋아서요.”

, . 감사합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사진이 얼마나 멋지게 찍혀졌는지는 모르지만 아침부터 기분이 업 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따뜻한 나라 그리스로 간다기에 두꺼운 점퍼는 벗어던지고 망토만 두른 나는 어쩐지 클레오파트라가 된 기분이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두 세 사람만 들어가도 복작거리는 작은 상점에 들어가 트로이 목마 모형을 몇 개 골랐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이 신신당부한 기념품이었다. 어디든 가면 그곳의 기념품을 하나씩 사 모으라는 미션을 준 것이다.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는데 나와 보니 모든 순례자들이 버스에 타서 내가 뛰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 때문에 버스가 못 떠나고 있었나보다. 그런데...저분들은 작은 엽서 하나도 안 고르시고, 아예 상점을 가지도 않고 계신다. 여행을 많이 해보신 분들이어서 작은 기념품이 나중에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골칫거리가 된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신 분들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