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의 첫날은 너무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네 시 이십 분. 야간 산책을 포기하고 왕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시라는 이른 시각(여행에서 밤 열시는 너무 이른 시각이다)에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닝콜은 여섯 시였으므로 준비를 일찍 마치고 아침의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그동안 빡센 스케줄 때문에 ㅠ새벽 5시에 일어나 다섯 시 반에 아침을 먹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오늘 기상은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뜨니 꿈이 너무 생생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꿈속에서 나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간증은 아니었다. 마치 바울처럼, 목사님처럼 단 위에서 많은 교인들 앞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시간동안 설교를 한 것 같았다. 마무리도 채 하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벌떡 일어서서 하나 둘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아아, 그때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 할 수 없다.
꿈속이지만 너무도 끔찍했다. 후회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왜 좀 더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용두사미가 되어버렸으니 이를 어떡하지 하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꿈에서 겨우 깨어났다.
나는 좀 더 많이 성장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님은 나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실 것 같은데, 아직 많이 모자라는 것 같다. 나에게 있는 달란트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무엇보다 기도가 우선해야 하겠지.
그리스 입성(?) 기념으로 스타킹을 신으려고 꺼내어서 잘 준비했는데, 담배를 피우려 발코니로 나가니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바닷가여서 그런가?
호텔 5층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어두운 새벽의 풍경은 뭐라고 할까... 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반짝이는 신호등.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사거리에서 얌전하게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 그들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것 같았다. 호텔을 마주보는 건물은 아래층은 상가, 윗층은 아파트 같았어. 재미있었던 것은 호텔방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무로 짠 루바 문을 달아놓았다는 것. 그것을 밀면 방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많이 닮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생각보다 바람이 찼다.
코디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 트렁크에서 옷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람들에게는 멋지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성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여자 순례자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옷차림에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날마다 코디를 바꾸어가면서 모양을 내는 재미도 여행의 맛에 포함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교회와는 달리 나 역시 내 만족일망정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옷을 골라 입었다. 예전에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옷 골라 입는 즐거움! 나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다른 순례자들도 나처럼 선글라스 쓰고 나처럼 모자 쓰고 나처럼 거의 매일 옷을 갈아입는데 어쩐지 유독 나에게만 곱지 않은 은근한 질시의 화살을 쏘는 것 같았다. 그냥 나의 느낌일 뿐이지만. 여자의 본능적인 질투이겠지만. 총무 장로님이 잘 대해주시는데 그 아내 권사님의 눈길이 다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인가 터키 가죽공장 견학할 때의 해프닝이다.
나의 진흙무늬가 있는 청바지의 바짓단 가까이 있는 무늬를, 장난삼아 떨어준답시고, 거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바지를 문지르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 하지만 꼭 즐거워서만은 아닌 것 같았어. 아내 권사님의 눈살이 살며시 찌부러진 것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아마, 룸으로 돌아가서 싫은 소리인지 했을 것 같다.
트렁크를 뒤져 머플러와 패딩코트를 골랐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 응석을 부리기로 했다.
하나님. 이번 여행에서는 멋진 모습으로 다니고 싶어 하는 저의 웃기는 마음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나는 아주 멋진 여자로 보이고 싶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보이고 싶어요. 글 잘 쓰고, 생각도 많고, 예쁘고, 멋지고, 매력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내 만족 때문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지요.
대담하게 나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싶어요. 누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옷 입고 약간은 거만하게, 내 중심적으로 모양을 내고 싶어요. 이제껏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 짧은 여행에서는 저의 그런 웃기는 마음을 그냥 눈감아 주시는 거죠?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시작될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은 잊어버리고 여행의 남은 시간들을 아주 멋지게 즐기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 막상 여행이 끝나고 나면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혜와 성령을 주셔서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정말 하나님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었던 여행을 여행경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 두렵기도 하고, 너무 좋기도 하고.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전도?
해야겠지. 하지만, 내 주위에서부터. 그것이야말로 정말 귀한 일이지 않은가. 피켓 들고 노방전도를 하는 것 보다는 관계전도가 더욱 깊이 있는 전도가 아닐까.
교인들과의 여행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룸메이트 왕언니를 통해 받은 은혜도 정말 컸다. 그분의 인생 역경을 들으면 저절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절제하면서 수천 만 원씩 헌금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다. 아. 그분에게도 배울 것이 정말 많았다. 나에게 꼭 맞는 룸메이트를 배정해주신 하나님의 배려는 세심하기도 하여라. 지혜롭고, 솔직하고, 순박하고, 순수한 그런 멋진 룸메이트를 주신 하나님께 또 감사드렸다.
옷을 갈아입고 발코니에 나가보았다. 새벽까지 비가 왔는지 아직 어두운 길이 젖어있었다. 한적한 새벽의 네오폴리스. 가라앉은 색감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편안한 색이었다.
룸메이트 왕언니와 함께 여닫이문으로 되어있는 신기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볼수록 기이하다. 옛날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문처럼 열고 닫았나 생각하니 정말 재미있었다. 로비에서 마침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가이드를 만났다. 나의 트렁크 비밀번호를 알려준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가이드 말이다. 가이드 역시 바닷가로 아침 산책을 가는 중이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리스 바닷가 건물들은 다 거기가 거기여서 가이드가 없으면 호텔로 오는 길을 찾느라 고생 좀 했을지도 모른다.
네오폴리스 항구는 다른 바닷가와는 좀 달라보였다. 글쎄... 그리스는 터키와 달리 좀 격조가 있다고나 할까.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새벽이어서일까 인적은 드물지만 바다로부터 밀려드는 비릿한 내음은 생동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가 간간이 오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흐릿한 하늘과 회색으로 변한 바다를 보니 아침부터 멜랑콜리해지는 마음이라니. 오늘은 어쩐지 그 우울과 벗 삼아 하루를 보낼 것 같다.
식당 앞에 모여 일곱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식당 오픈 시각이 일곱 시였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한국의 순례자들은 이미 거의 식당 앞 소파에 진을 치고 앉아 있다.
어제 저녁, 멋진 그리스 남자들이 모여 앉아있던 식당 앞 로비의 멋진 소파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그 남자들은 호텔에서 잠을 잤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았겠지. 공간 활용이 잘 되어 있는 쾌적한 로비였다.
식당에서 모처럼 베이컨 구이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베이컨 구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이곳이 유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삭하게 튀긴 베이컨을 제법 많이 먹었다. 터키와 다름없이 그리스에서도 뷔페 식단에 삶은 계란은 빠지지 않는다. 유난히 계란 욕심이 많은 나는 결국 따끈따끈한 삶은 계란을 두 개나 먹었고, 게다가 향기로운 커피도 –블랙이었지만-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 약간의 우울이 깃들었던 가슴이 블랙커피 두 잔에 녹작지근해졌다.
룸으로 가기 위하여 미닫이 문 엘리베이터 를 기다리는데 가이드가 살며시 다가와 나에게 무엇인가 건네준다. 무엇을까 하면서 보니 뜻밖에도 늘 휴대하던 나의 라이터였다. 어느 틈에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계면쩍었다. 하지만 다른 순례자가 주워 주는 것 보다는 마음이 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가이드는 나에게 <조용한 친절>을 자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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