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 他人의 장례식
오늘 일기의 전문이다. 쓰다보니 수필이 되어버렸네?
새벽 4시에 일어나 꽃단장하고 타인의 장례식에 간다. 역까지 바래다 준 택시기사가 묻는다. 전철이 있나요? 다섯시에 첫 차가 있습니다. 나는 검은색 일습의 단정한 옷차림에 맞게 그렇게 단정하게 말해준다. 첫 전철을 타면 대개 비슷한 모습을 한 중늙은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보아하니 건설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 같다. 허름한 작업복차림의 그들은 오늘 어디에서 구슬땀을 흘렸을까. 그들의 자식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대형영화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영화한 편 때릴동안. 다섯 시 사십분에 교회에 도착하여 여섯 시 새벽예배를 드린다. 부지런하고 신심깊어 보이는, 얼굴 표정이 온화한 신자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듣는다. 중간에 예배당을 나와 지하 홀로 간다. 조가를 연습하는 사람들은 모두 열심이다. 분명 살아 생전에는 얼굴 한 번 안 보았을 사돈의 팔촌 쯤 되는 장례식이다. 그래도. 비 내리는 장례식장에서 조가를 부른다. 잘 부르지는 않지만 정성이 깃들여 있어서 모두들 감명받는 눈치다. 나는 타인의 영정사진을 본다. 1928년생. 만 80세 노인의 얼굴이 희미하다. 호상이어서인가 상주들의 얼굴이 그다지 어둡지 않다. 기독교에서는 장례식을 천국환송예배라고 한다. 정말 그분은 천국에 가셨나? 장례버스를 타고 벽제로 간다. 셀 수없을 만큼 많이 그곳에 갔다. 요즘은 죽기도 힘들다고 한다. 화장장 예약이 밀려 사흘 장이 아니라 나흘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후손들의 걱정을 덜어주려면 오전, 그것도 일찍 돌아가셔야 한다고. 장례식의 주인은 망자가 아니고 상주들이다. 상주들은 바겐세일처럼 장례를 치룬다. 빨리, 신속하게, 그리고 그만큼 빨리 잊을 것이다. 로전실로 들어가는 관을 본다. 요즘은 현대화가 되어 모두 자동으로 이루어져있다. 문이 닫힌다. 다가올 어느 날 나의 관이 저곳으로 들어가고 저렇게 문이 닫히면 나를 위하여 온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상주들은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제법 멋들어진 식당에서 만원짜리 삼계탕을 먹는다. 닭은 정말 크다. 타인이 불화로에서 활활 타는 동안 우리는 땀을 흘리며 삼계탕을 먹는다. 인삼을 골라내면서 건강을 이야기한다. 아무도 망자에 대하여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온통 미래에 관한 것 뿐이다. 미래, 그것이 나에게 있는가. 귀가 길, 나 혼자 내려 북한산을 지나는 시외버스를 탄다. 구불구불한 길 옆에는 뉴타운 아파트가 새로 입주중이다. 최신 디자인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환상적이고 탄성을 자아낸다. 우리는 이렇게 인위적인 건물에 익숙하고, 아파트 개념은 아직도 재산가치로 판명된다. 산쪽에 자리잡은 아파트 동수를 외운다. 저렇게 산 바로 아래 아파트에서 살면서 코 앞의 산을 매일 바라보는 사람은 신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아무리 우스워도 내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옷을 훌훌 벗는다. 벽제 화장장에서 몇 시간 머물다 온 나의 옷가지들은 세탁기 속으로 들어간다. 중음의 시간처럼 그 옷들은 내일까지의 시간을 어두운 세탁기 속에서 견디어야 한다. 나는 죽은 듯이 두 시간 잠을 잔다. 꿈은 두서없이 계속 이어진다. 혼자 삼계탕 먹은 것이 미안하여 사온 닭 한 마리도 냉장고에서 중음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옷처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오늘 장례식을 치룬 타인에 대하여 십분이나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왜 타인의 장례식에 갔던 것일까? 누구를 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가를 불러준 것일까. 내 삶에서 가끔 타인의 죽음이 보여지는 것이 필요해서였다, 가 가장 솔직한 나의 대답이다. 나는 내 죽음을 타인이 와서 관람하면서 자신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짧은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용납할 만큼 관용이 있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장례식에 타인이 오는 것을 사양한다고 유언에라도 써야하는 것인가?
아들을 위하여 닭 요리를 하면서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닭!
정확하게 5분 후, 아들이 집으로 왔다. 어찌나 닭 요리를 좋아하는지 회식자리도 마다하고 집으로 뛰어온다. 뭔가 아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 일이 있을 때, 혹은 저녁 외출이 있을 때 닭 요리 하나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통과된다. 만원 안짝으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다니 우리 아들은 참 소박하시구나.
낮에 거하게 먹은 삼계탕으로 인하여 체지방이 매우 염려된 나는 저녁에 두 시간은 천변을 걸을 결심을 단단히 함. 두루말이 화장지와 락스는 오는 길에 들고 걸어오기로 했다.
아들의 저녁을 차려주고 운동화 신고 집을 나섬. 휴대폰에 내장된 99곡의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 좋게 걸을 것이다, 하고 걷는데... 늘 가는 단골 선술집에 혼자 앉아있는 시인을 발견!
문을 죄다 열어놓아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바람에 나에게 발각당한 시인은 나를 보고 놀래는 눈치다.
자다 일어난 맨 얼굴에(분명 부시시했을 것이다) 짧은 반바지(오동통한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난)에 헐렁헐렁한 티셔츠차림의 나는 시인의 (텅 빈) 앞자리에 앉아 잠시 놀다가기로 했다.
선술집 바로 옆은 잔디에 여러 풀들이 있어서 운치가 그만이었는데 시인이 어느 곳을 가리켰다.
"저기 옥잠화 깃대롤 좀 보세요."
옥잠화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나는 한참 헤맨 끝에 문제의 옥잠화를 보았다.
"뭘요?"
"저 놈들이 아까부터 그렇게 있네요."
"뭐가요?"
"안보이세요? 잠자리 두 마리?"
나는 눈을 꿈뻑거리면서 옥잠화의 말라비틀어진 대궁을 오래동안 관찰하였다. 잠자리가 어디 있나?
멍청한 나의 얼굴을 본 시인이 웃었다.
"잘 보십!(문인들이 모이면 가끔 쓰는 언어인데 마지막 어미를 잘라먹는 습관이 있다)"
시인의 말에 잘 보시니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가지처럼 보인 것이 가지가 아니라 잠자리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이쪽에 또 한 마리는 저쪽에 마치 가지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쉿."
시인이 조용히 하라고 했다. 지금 잠을 자는 모양입니다. 깨우지 마세요.
잠자리가 깰까봐 조요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학과 문학을 사랑하는 영혼과 그리고 삶의 방식, 뭐 그런 다양한 주제들이었지만 일단 내면의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다 보니 대화는 참 재미있었다. 술 두 잔 얻어마시고, 담배 두 대 곁들여 피우고 일어섰다.
체지방을 줄이기 위하여 천변 한 바퀴 돌 시간동안 안주 몇 점 집어먹고 술 한 잔 했으니 체지방이 오히려 플러스 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천변을 걸었다. 비가 그친 천변은 서늘했고 걷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걸으면서 시인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시인은 나에게 참 자유로워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시인에게 물었다. 무엇이요? 그냥, 다요.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자유로운가? 과연 자유로운가? 영혼의, 끝간데없이 뻗어가는 자유로움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던지! 나는 시인에게 말했다.
자유로울지도 모르지요, 남들에 비하여서는. 나의 본성을 나는 알아요. 블로그에 나에 대하여 말하는 칸에도 썼잖아요. <퇴폐적이고 감상적이며 비도덕적이며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며 충동적이며 무모하며 파괴적이며 열정적인> 그런데 삶은 그 본성을 끊임없이 가라앉히고, 그리고 숨기고, 발설하지 말라고 강요하지요. 특히 종교에서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지요. 나는 하나님께 늘 묻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러한 감성을 주셨나요? 분명 쓰실 곳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인가요? 가장 나 다운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해주어요.
그것에 대한 응답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것을 느꼈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한 어떤 것이요. 그래서 나는 7월 한 달 동안은 소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을 완전하게 누리면서 다른 어떤 글(시인에게 일기를 쓴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천변의 끝까지 걸어갔다. 천변의 끝에는 홈플러스가 있다. 24개 롤 화장지를 사고 향 락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좀 비싼) 블랙커피 한 캔을 샀다. 한 손에는 화장지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2킬로 가까운 천변을 다시 걸어왔다. 힘들었지만 내 몸에 대한, 내 영혼에 대한 고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싶은 여자, 칸나,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이숙경 권사가 내 몸안에 공생하고 있다.
자정 너머 우연히 돌린 리얼TV 채널에서 탄트라에 대하여 방영하고 있었다.
점잖은 설명이 곁들어진 성희 장면이다. 나는 놀랐고, 그리고 집중했다. 심리학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인도 전통음악과 영혼을 위한 몸의 마사지 방법도 소개되었다. 나는 남녀체위를 설명하면서 그렇게 고상하게 말하는 장면은 처음 보았으므로 상당히 경이로웠다.
나는 기독교도 저렇게 점잖은 설명으로 진지한 표정으로(소리지르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협박하듯 을러대지 말고 소리 질러 놀래키지 말고 이하 생략)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시간이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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