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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24. 데살로니키(데살로니카)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아볼로니아의 바울의 사적지를 거쳐 데살로니키 성벽을 찾았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 데살로니카의 현재 지명이다. , 저토록 아름다운 돌들이 모여 성벽을 만들었구나. 나는 돌을 밟고 돌에 기대어 돌로 이루어진 도시의 건축물을 보았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벽에서는 구 데살로니카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웅장하고 넓은 규모의 도시였다. 재빠르게 선물가게에 들러 몇 개의 기념물을 골라샀다.

그리고 성 드미트리우스 기념교회를 찾았다. 그리스 정교회답게 내부의 벽과 천정은 온통 성경 이야기로 가득 찼다. 성당에 들어가 순례자들 맨 뒤에 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중 마는 둥 하는데 멋진 액자 밑에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작은 메모지가 쌓여있고 펜까지 구비되어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혹시.

나의 트렁크를 열어주었던 가이드에게 물었다.

왜 이 곳에 메모지가 있는 거죠?”

, . 소원을 적어서 액자의 작은 틈에 끼워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자기의 소원을 적게 성당에서 구비해 놓은 것이지요.”

과연 액자 틈마다 작은 쪽지들이 꽉 차 있었다. 소원... 나는 펜을 들고 한참 망설였다.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표정이 온화해 보이는 액자였다. 그 표정은 너무도 편안해서 덩달아 나의 마음도 편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원을 적을 셈이었다. 마음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아릿한 슬픔이 명치끝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소원을 적었다. 작게 접고 또 다시 작게 접어 액자의 틈 속에 끼워넣었다. 틈 마다 빈틈없이 끼워져 있는 메모지를 보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나처럼 한참 생각하다가 정성스레 소원을 적어 틈마다 끼워넣었겠지. 부디 그들의 소원도 이루어지기를. 소원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할 거야.

 

행복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6억짜리 벤츠 관광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열어놓고 내장된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시간.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새하얀 비석들이 가득 있는 작은 묘원을 지났다. 흐린 날이어서 더욱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이곳에서도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있구나. 세상은 넓지만 어찌 보면 너무도 닮은 것이 많다.

지금 시각은 오후 65. 비가 오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혹은 때에 따라 산등성이를 지나면서, 길고 긴 버스 여행을 하고 있다.

마치 나 홀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완벽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다가올 날을 꿈꾸지 않고 온전히 현재의 시간을 즐기는 바로 이 시간. 나에게 이런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멀미약을 준비하셨느냐는 가이드의 상냥한 보살핌. 이제부터 산굽이를 계속 돌 것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란다. 버스는 천천히 산등성이를 계속 돌아가고 있다. 하늘빛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빗물이 비친 도로는 매끄러워 보인다. 내가 스쳐간 이 길들을 다시 갈 수 있게 될까. 아마도,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리라.

여럿이 함께 하지만 또한 이렇게 혼자일 수 있는 이 여행이 정말 좋다. 순례자들 틈에 끼면 더할 나위 없이 종교적이 되고,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은 무한히 퇴폐적일 수 있는 이 여행의 맛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단정하고 낯선 집들을 지나고, 앙상한 나무들을 지나고 있다. 나직한 구릉위에 세워진 집들은 모두 절제된 미를 가지고 있다. 하늘의 색이 점점 어두워지게 있다.

내가 좋아하는 짙푸른 감청색이 되려면 삼십분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 감히 이 시간을 최고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과 비오는 하늘과 길을 달리는 버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이 있고, 쾌적한 공간이 있다. 여기는 천국임이 분명하다. 조금 더 바란다면, 담배 한 대를 피울 수 있었으면... 그것은 호텔에 들어가서 짐을 풀어야 해결될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시집 <키스>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아주 천천히 앞부분을 읽는 중이다. 그런 멋진 시들을 읽을 때, 행복하기도 하고, 온몸을 내 스스로 상처내고 싶을 만큼 깊은 실의에 잠기기도 한다. 대체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진심으로 내 자신에게 되물어보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대체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이중적이면서, 지독하게 경건하고 싶은 만큼, 아찔할 정도로 퇴폐적이고 싶은 이 두 마음을 하나님은 어째서 정리해 주시지 않나.

아아. 점점 하늘이 어두워져가고 있다... 이제 음악을 들으면서 하늘을 봐야할까 보다. 나는 이 길을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이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 때 정말 행복했어, 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온다면 그 때는 불행한 순간일까.

 

가이드가 그리스 노래를 틀어주었다. 나나 무스꾸리, 그리고 멜리나 메르꾸리.

멜리나 메르꾸리의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래 동안 즐겨 들었던 영혼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금지된 영화 <페드라>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 섹시하고 육감적이고 멋진, 허스키 목소리가 고혹적인 여자, 멜리나 메르꾸리. 그녀는 배우이면서도 가수였나 보다.

사십여 년 전, 나는 디제이가 있는 곳에 가면 늘 페드라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리퀘스트했다. 물소리와 기타 소리가 들리고 떨리는 음성까지 그대로 나오는 그야말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아임 쟈스트 투에니 포. 온리 투에니 포. 나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라고 주인공 남자는 절규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음악을 열심히 들었을 때 겨우 스무 살이었던 나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조차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스물네 살이 오기는 올까. 과연 그때까지 나는 살아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 두 배 이상의 세월을 보내고 그리스의 산골짜기를 도는 버스에 앉아 멜리나 메루꾸리의 노래를 듣고 있구나. 수명이나 운명이나 생명은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수없이 내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살아온 세월을 떠올리니 새삼 생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미로처럼 얽혀있어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이토록 두려움을 가지는 것도 어쩌면 쓸데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

격동의 스무 살이 그렇게 지나갔고, 방점 하나 찍을 사연조차 없는 수십 년이 흘렀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분명히 살아있다.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창밖을 내다보고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이것 또한 지나갈지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