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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스토커

24일 -분홍 神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3.

24일 - 분홍 神

 

 

묵상.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편 62:1)

<마음속의 갈등으로 인한 소음과 세상적 욕망의 속삭임이 잠잠해지고,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잠잠히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만큼 잠잠한 영혼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성경 묵상

사도행전 8장

오늘 성경말씀에는 유독 '기쁨'이라는 단어가 반짝거린다.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8절: 그래서 그 성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

12절: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35절: (에티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만나는 장면)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39절: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이름에 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고, 그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로 인해 그 성에는(사람에서 지역으로 확장되었구나!) 큰 기쁨이 넘쳤으며, 간다게에게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자, 즉시 세례를 받고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전염병처럼(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사람에게로 성까지 번져가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그런데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그 기쁨이 전파되고 있는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기쁨이 넘치는지, 기쁨에 찬 생활을 유지하고 영위하는지, 그것이 정말 의문스럽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적어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해야 할 것이며, 그 기쁨이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족, 그밖의 관계된 많은 사람, 지역에까지 퍼뜨려야 할 것이며, 그 사람들도 기쁨에 넘쳐 가던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반성해본다. 나는 기쁜가? 늘 기쁜가? ... 늘 기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행복지수가 무지하게 높은 편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는다. 완벽한 기쁨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8:2 정도로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자가 점검했다. 그것은 소유와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 확실하다.

우리 가정의 경제를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국가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도 무조건 진찰비 천원, 약국에 가서 한 달 분 약을 지어도, 일주일 치 약을 받아도, 아무리 비싼 약을 포함해도 약사가 나에게 요구하는 금액은 단 돈 오백 원이다. 나라도 인정해주는 우리 가정의 빈곤한 사정은 교회에서는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내가 매우 부요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하여튼 행복지수나 기쁨지수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런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나에게 불순물 좀 제거 시켜 주셔서 좀 더 완벽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러고 보니 문득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이 떠오른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다가오지 않았지만 요즘이라면 조금 더 루이스의 마음을 접근하여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빌려보지 말고 한 권 사서 밑줄치고 읽자!  

 

몇 년 전, 교회에서 일년 과정의 성인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열 두 명 정도의 교인들과(주로 사오십 대 여자) 담당 목회자와 같이 1:1 제자 양육 책을 교재로 대화 토론 연구 수다 등을 짬뽕하여 시간이 진행되었는데 가을 막바지에 관상기도에 대한 특강을 듣게 되었다. 외부에서 초빙된 관상기도 전문 목회자가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평소 기도에 대하여 미진하게 생각했던 모든 고민들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웠다. 향심기도문을 알게 된 것도 축복이었다. 그것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서재(마리서원)에 붙어있다. 기도문만 읽고 있어도 모든 불순물이 사라지고 온 정신이 순결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 은혜를 같이 나누고 싶어 벌써 여러 사람에게 프린트물을 선물했다. 나는 작게 프린트해서 수첩사이에도 끼워 넣었고, 성경책에도 접혀져있다. 어디서나 기회가 되면 펼쳐놓고 읽기 위함이다. 기도문의 첫 문장은 나의 신춘문예 당선소감에도 언급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기도문이었다.

그렇게 멋진 향심기도문을 소개한다면.

 

제 존재의 중심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리고 사랑안에서 주님께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주님의 현존 속에서 고요히 쉬게 하시며,

제 안에 내적 침묵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 이 시간 주님이 제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정서의 찌꺼기들을 씻어주시며,

상한 감정들과 내면의 상처들을 치유하여 주소서.

주님, 이 기도를 시작하면서 거룩한 단어를 하나 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주님이 계시고, 제 안에서 주님이 활동하신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저의 지향을 담은 상징입니다.

주님, 기도를 드리는 도중에 분심을 알아차릴 때마다

제가 선택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며 기도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저를 새롭게 빚어주시고,

새롭게 창조하여 주소서.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당신의 뜻을 제게 이루소서.

 

기도문에서의 거룩한 단어를 나는 주님이라고 정하고 분심이 생길 때마다 주님을 불렀다. 막상 기도를 시작하자 내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단 오분 동안 나는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수십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며, 그리고 슬픔과 고통과 행복의 절정을 건너뛰고 있었다.

영성이나 관상은 아무래도 가톨릭 쪽이 우세한 듯 보인다. 나는 명동의 바오로 딸(가톨릭 서점으로 무척 오래되었다. 우리 남편과 연애할 때 들렀을 정도로)에 가서 찾아낸 두 권의 책도 소개한다. <내 안의 하느님 자리>라는 소책자와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하는 30일 묵상집>이다. 특히 관상기도의 권위자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만든 30일 묵상집은 한 달 동안 매일 들고 다니면서 묵상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소책자였다. 어찌나 좋았던지 몇 권을 더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개신교에서의 행동중심 기도문이 아니라 심령의 깊은 곳을 뚫고 명상하게 만드는 작은 책이 주는 커다란 기쁨은 어디에 비교하기 힘이 들 정도!

 

어제 밤부터 부쩍 굵어진 빗줄기가 밤새 거실 창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천변의 거센 황톳물은 산책로를 삼키고도 모자라 기세등등하게 급물살로 흘러간다.

빗속을 뚫고 도서관을 갔다. 오늘 수필접기 동아리 마지막 수업을 한다고 해서 깜짝 등장을 할 예정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만큼 든 사십대의 가정주부들이지만 선생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들 하니 미리 긴장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내가 올 줄 모르고 강의실로 들어오는 회원들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비가 거세게 퍼부어 대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성실하게 참석한 회원들을 보니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나이로 말한다면 오히려 나보다 윗 연배 되시는 분도 있고, 서너 살 아래 회원도 있지만.)

학생들 틈에 끼어 앉아 그들과 똑같이 짧게 평도 하고 단상 읽기도 참여하면서 즐거운 시간. 나중에는 자습한 작품들에 대해 짤막하나마 촌평도 해주고 결론적인 강의도 약간 곁들였다.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사고의 확장이다. 성실, 근면하게, 현모양처로만 살아온 그녀들의 삶에 자아 찾기와 같은 새로운 모색도 필요하다. 나는 그들에게 늘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착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행복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여러분의 것인가, 아니면 학습에 의하여 습득된 것인가....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자신이 진정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처 그곳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착하게만(?) 살아온 그들에게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거꾸로 증명해보이고 싶다.

 

수업 후, 빗속을 뚫고 전원에 멋지게 자리 잡은 칼국수 집으로 갔다. 기분이 좋아 내가 한 턱 쏘기로 한 것이다.

사골 칼국수가 어찌나 맛있는지,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빗속의 전원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일 년 넘게 사제의 연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찌나 좋던지 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한참 고민하다가 더 참지 못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종업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술을 팔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가지고 오셔서 드세요. 그렇게 하세요."

아, 이런. 이렇게 좋은 날 술 없이 그냥 보내야 하다니. 나의 절망적인 표정을 본 회원들이 일제히 배를 잡고 웃었다.

 

최홍만이 먹어도 남길 것 같은 양의 칼국수를 거의 다 먹어치운 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남산만해진 배를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살풋 잠이 들었다. 나를 깨운 것은 믿음의 동역자인 친구의 전화였다. 친구의 목소리가 장난 아니게 들떠있다.

"뭔 좋은 일이 있슴?"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그러면 술이나 한 잔 사지."

"아이, 참. 그대 요즘 알코홀릭인거 몰라?"

"됐거든. 사주기 싫음 말고."

"이유를 안 묻네?"

"안 묻고 싶지만 하는 수 없이 물어봐줘야겠네. 뭐가 그리 좋으신고?"

"책 때문이야."

그리고는 어쩌고저쩌고 저 혼자 열불을 내면서 떠들더니 감질이 나는지 친구가 말했다.

"지금 버스타고 갈 테니까 집 앞으로 나오시게."

"그러시던지."

친구는 버스 안에서도 죽도록 뛰었는지 번개처럼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가슴에 던져주는 책.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 비판,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름없는 하느님>이라는 책이었다.

힌신대 교수라면 개신교 신학자일텐데 하느님, 이라고 (보통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따로따로 부르는데) 쓴 의도가 꽤 궁금해졌다. 친구는 술 마신 것처럼 흥분된 상태였다. 물론 친구의 주량은 맥주 100 씨씨이다. 그냥 구색에 맞게 술잔 앞에 놓고 노는 수준이랄까...

친구 왈, 우리가 만날 때마다 고민했던 거의 모든 신학적 고민이 이 책을 읽으면서 해결되었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 개신교도 이제는 저렇게 도도하게 흐르는 황톳물 같은 대세를 거스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물꼬를 트고 열린 마인드를 보여준다는 것은 결코 타 종교에 대한 양보도 아니고 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것저것 더불어 가지고 온 책 네 권을 집에다 떨구어놓고 우리는 물 빠진 천변을 걸었다. 오후 6시의 천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같이 나누는 대화는 어찌 그리 달콤한지.

그러다가 어찌하다보니 지난날의 쓴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은 아마 엊그제 사진 보던 이야기 끝에 나온 것 같다. 내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쓴뿌리, 한, 상처, 아직 치유되지 않는 그런 아픔 기억들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동감했다.

콸콸 흘러가는 거센 물살을 보니 문득 야곱이 말이 떠올랐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그렇다. 나에게도 친구에게도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이다.

나는 물살을 보면서 떠내려 오는 죽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한때의 나는 뛰어들고 싶고, 뛰어내리고 싶었던 세월도 있었다... 잊고 싶고 잊어야 하는 기억은 하나님이 완전히 잊게 만들어 주시는 수밖에 없다.

친구와 나는 작년부터 줄곧 일박 이일 여행을 꿈꿔왔다. 하룻밤 어디 가서 -기도원이든, 민박집이든, 절간이든 하여튼 집을 떠나서 - 각자 틀어박혀 나름대로의 쓴뿌리를 제거하고 오자는 희망으로 우리는 또다시 여행을 계획했다. 기도를 밤새워 하든, 술을 밤새워 마시든, 술 마시고 기도하든, 아쨌든 간에 하고 싶은 방법을 다 써서 어떻게 하든지 가슴에 꾹꾹 저며 놓은 상처들을 다 끄집어내고 살풀이(이런 말 쓰면 안 되겠지)하고 회개할 것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회복하여 돌아오자, 고 굳게 다짐했다.

비는 간간히 흩뿌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천변에서 이렇게 오가기를 한 시간을 넘어가 두 시간을 바라보는데 친구 남편으로부터 번개 제의 전화가 왔다. 그리하여 부부 두 팀이 만나 치킨 번개!

우리 집 상가  포장마차에 둘러앉아 결국 술 한 잔 같이 하면서 하하 호호 즐거운 저녁을 보냄. 그렇구나, 오늘은 결국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날이잖나!

 

낮에 살짝 잠이 들었던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은 발동이 걸릴만 하던 차에 스톱되었으므로 나는 대략난감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한 밤중에 -두시 넘어서까지-책을 읽다가 뭔가 끄적거리다가 하면서 밤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상스러운 글.

 

<나의 부음을 들었을 때 그분을 위로하는 노래> 라는 이상한 제목의...^^

 

당신에게 미쳐서

저기 물살에 떠내려오는

할례받지 않은 나의 발목에

묶인 

피묻은 연서를 풀러주세요

 

분홍 神을 신고

춤을 추면서 열 한 시간

분홍 神을 신고

춤을 추면서 일흔 두 해

 

나의 등에 꽂힌 미늘을 빼주세요

나의 영혼에 박힌 타부를 인쇄하세요

페이지 4쪽 둘째 줄을 읽으세요

 

분홍 神을 신고

춤을 추면서 열 아홉살

분홍 神을 신고

춤을 추면서 쉰 두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