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 페드라
묵상. 기도의 열매는 우리의 삶이 좀 더 훌륭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가 당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열매를 보는 것은 성령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멘.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저녁 다르고 밤 다른 저를 좀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열된 자아를, 때마다 장소마다 확연하게 차이나는 나의 이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꼭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를 묻고 싶습니다만.)
아침부터 계속 꼬였다. 어제 밤 친구들과 만나는데 또 미국 친구가 휴대폰으로까지 전화를 해오더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전화부터 받아야 했다. 헌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내가 잘 들리면 그쪽이 안 들린다고 하고, 나는 안 들리는데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는 모양이다. 혼선도 되고, 완전 70년 대 국제전화 하는 것처럼 감이 좋지 않아서 서너 번의 통화 끝에 결국 친구가 통화를 포기했다.
게다 직장에 간 아들이 긴급 전화 미션! 책상위에 분명히 놔두었다는 중요한 쪽지를 찾느라 한시간 동안 난리가 났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낙심한 아들이 자신의 방에 손대지 말라는 계엄령이 떨어졌다. 남편이 아들 방 청소를 해준답시고,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서 정작 찾을 수 없게 된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중요하다는 쪽지는 곤죽이 된 채 발견되었다. 때는 늦었다. 아들의 양복바지 뒷주머니에 있었던 그 쪽지는 세탁기에서 한 시간 여 동안 뺑뺑이를 당한 끝에 끈질기게 달라붙고 글씨들이 엉겨있는 상태였다. 나는 너무도 서운하여 피아노 위에 얇게 펼쳐서 말렸지만, 도무지 글자를 해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 이런.
결국 아들은 온종일의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미안, 아들아. 앞으로는 엄마가 빨래를 해야 할 것 같다.
요즘 남편이 세탁기를 돌리는데(벌써 몇 년 되었지만) 주머니를 뒤지는 일을 잘 잊어버리는 바람에 종종 그런 일이 생겼다. 역시 남자는 아무리 우량주부라고 하여도 여자 불량주부만도 못한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어제의 후유증에다가 잘해준다고 아들 방을 치워주었는데 야단(?)만 맞은 남편이 뿔났다!!!
우량주부, 완전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설거지며 빨래, 청소, 그 모든 집안일에 대하여 손을 놓겠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그 덕택에 간만에 빨래 널고(그렇게 힘들 수가!), 설거지 하고, 마른 빨래 제자리에 정돈해서 넣어야했다. 작은 일들의 연속인 집안 일에 치여, 책을 읽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 작업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남편의 파업에 대하여 흥, 하고 코웃음은 쳤지만 잔일 때문에 역사 자료팀에서의 교수님 원고를 프린트조차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이게 뭐람!
내가 약간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거실 소파에 누워 지그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남편이 너무도 얄미웠지만 파업 선언할 때, 그까짓것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큰 소리 치느냐, 내가 쉬엄쉬엄 다 할 수 있다, 그렇게 큰소리쳤기 때문에 일 좀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 집안일이라는 것이 시간 잡아먹기에는 최고인 거 같다. 청결 유지, 정리정돈 유지,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 않던가.
초봄에 개비한 청소기 작동법도 모르는 나로서는 매우 난감한 하루였다.
짜증도 전염이 되는지 일의 진척이 더디어지자 나는 음악 듣기로 오늘 하루 컨셉을 바꾸었다. 어찌어찌 옛 노래를 고르던 중 페드라를 찾아냈다. 요즘은 영화 장면도 동영상으로 나와 있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몇 컷씩 보니 가슴이 스멀거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타부시 되는 금지된 사랑은, 그 독한 매력을 어찌할 것이냐!
영혼이 자유로운 나는(요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칸나인 나의 대명사이다)페드라 연속듣기로 나의 빈약한 삶의 허기를 메우면서 두 시간여를 흘려보냈다.
저녁때까지도 우량주부 파업을 고수하고 있는 남편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닭백숙을, 그리고 아침 쪽지 분실 사건으로 기분 상했을 아들을 위하여 매콤한 닭볶음을 만들어 놓았다. 두 남자 모두 입이 헤 벌어져서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맛나게 드심. 나는 닭백숙 드시는 남편 옆에 붙어 앉아 술 한 병씩 나누어 마셨다. (나는 오늘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변명한다. 대화 진척이 없을 때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아는 이상,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오후의 계획으로는 늦은 밤, 천변을 두 바퀴 왕복할 예정(거의 십 킬로)이었으되, 결국 산책겸 운동은커녕 일주일 내내 이틀에 한 번 꼴로 (그토록 성실하게)술판을 벌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를 어찌할꼬. 내일 아침이 되면 또 왼쪽 눈동자에 특히나 핏줄이 터져있을 터인데...
하나님~
7월은 덥기도 하고, 마음이 매우 루즈해지는 휴가기간이기도 하니 이 나태한 나의 영혼과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를 아침마다 외치는 저를 있는 그대로 좀 봐주실 의향은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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