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밤은 이스탄불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스탄불. 옛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이라 불리웠던 곳.
여행 첫 날은 이스탄불 공항에서 바로 아다나 공항으로 직행했으므로 엄밀히 말해 이스탄불의 땅은 처음 밟는 셈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오래 전, 터키에 가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마침 그 때는 터키가 새로운 여행지도 급부상하던 때였으므로 나 역시 인터넷을 뒤지면서 터키 행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갈망을 소설에 등장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중년 여인네의 외국 여행이 그렇게 만만한가... 삶의 우선순위에 밀리다보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야 겨우 가게 될지 어떨지...
나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소설에서라도 그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그렇고 그런 여자의 삶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은 어찌 보면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였으므로. 소설 속의 여자는 유일한 꿈인 터키 여행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고난도 불사하면서 꿈을 이루려 한다. 매일 터키 여행지를 품에 안고 자면서 오매불망 터키 여행을 꿈꾸던 여자는 결국 고단하고도 지리멸렬한 일상에 밀려 터키 여행을 포기하고 만다는 슬프디 슬픈 소설이었다.
나는 그 소설을 쓰면서 아마 나의 인생도 터키를 그리워만 할 뿐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때부터 나의 여행을 기회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너는 꿈도 없느냐. 내가 보내 줄 테니 기다려라, 하고. 그러고 보면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또한 우리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만큼 터키는 나에게 매혹적이었다.
공항에는 터키에서 가이드를 했던 선교사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터키 현지 가이드 하산은 다른 여행팀과의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했고, 조금은 치근거렸던 운전기사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착한 순례자들은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어쨌든 머나먼 이국땅에서 우리와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선교사 가이드였으니까.
열흘 가까이 끌고 다니는 바람에 더욱 흠집투성이가 된 트렁크를 질질 끌고 가면서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호텔에 짐을 부릴 일도 없겠구나. 마음 한편 가뿐하기도 하면서 어쩐지 허전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테이프가 덜렁거리는 침묵의 소울 메이트였던 나의 트렁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제 짐 정리에는 달인 수준이 되었는데 아쉽구나.
이스탄불 시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층의 단체 룸은 백퍼센트 한국 여행객들로 꽉 차 있었다. 기가 막혔다. 눈치를 보니 목사 부부의 순례 여행팀도 있었고, 다른 교회에서 모집한 순례자들도 있었다. 마치 한국 식당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한국 사람답게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잘 드신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답게 여기저기서 주문하고 요구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빙 하는 터키 청년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다. 나는 어쩐지 미안해져서 여행 끝 무렵이어서 이제는 아무도 주지 않는 팁을 주었다.
“땡큐.”
내가 순진한 눈매를 가진 터키 청년에게 한 인사말. 정말 고마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 관광객들을 시중드느라 진이 빠진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룸메이트 왕언니가 나를 보고 엄지를 쳐들었다.
“역시 멋있어! 팁도 잘 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해요.’
내가 속으로 왕언니에게 한 말이다. 내가 없으므로 없는 사람에 대하여 더욱 연민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려울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도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것이다. 내 주위를 돌아보아 그런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달러 몇 장으로 고달픈 사람을 잠시나마 즐겁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나도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는 이럴 때 더욱 강렬해진다. 돈이 있다고 저금을 할 나는 아니지만 풍성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주고 싶을 때 아낌없이 주면서 그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 저에게도 돈 좀 주세요. 저만 쓰지 않고 남들과 기쁨을 함께 할게요.
하나님께 아양 기도를 한 방 올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 메아리처럼 즉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터키 빵을 손으로 뜯어 먹으면서 그 맛을 머릿속에 넣었다. 달지도 부드럽지도 않는 빵의 매력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주식이란 그렇게 강렬한 맛이면 안 되는 것이다. 마치 밥처럼.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지만 결코 아무 맛도 아닌 것은 아닌. 한국에 돌아가면 터키 음식점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가서 빵을 스프에 찍어먹으면서 터키에서의 추억을 되새김질할지도 모르지.
식사 후 호텔로 향할 때 서울에서부터 동행한 가이드를 살짝 불렀다.
“저기요, 부탁이 있어요.”
“아, 네. 말씀하세요.”
나의 트렁크를 열어준 은인 가이드는 진중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그런 남자가 좋다.
“실은 내일이 내 생일이거든요. 내일 스케줄에서 조촐하게 생일 파티 할 곳이 있나요? 예를 들면 식당에서 특별음식을 더 주문한다거나 아니면 티타임이 있다면 그 때 시간을 좀 만들거나. 하여튼 우리 순례자들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해서요.”
가이드는 가만히 일정을 더듬는 눈치였다.
“점심은 모처럼 한식이지만 식당에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 좀 그럴 것 같고요, 오후에 배를 하나 전세 내어 보스포러스 해협을 한 시간 가량 돌 예정인데 그 때 하면 좋을 것 같네요.”
“와우!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케이크랑 샴페인, 그리고 접시 따위 필요한 것을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가능하면 아주 멋지고 그럴듯한 케이크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이드님과 저만의 비밀입니다.”
“물론이죠.”
우리는 무슨 범행 공모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은밀한 웃음을 교환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에서의 선상 생일파티라. 생각만 해도 너무 즐거웠다. 더구나 아무도 모르게 준비했으니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았다.
생일.
어릴 때 생일 파티를 열심히 준비해 주셨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생일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공주님 생일이 사흘 남았구나. 무엇을 가지고 싶지?”
“우리 공주님 생일이 내일 모레로구나. 무엇을 먹고 싶은지 말해보아라.”
“우리 공주님 생일이 내일이로구나. 아침에 태어나서 늘 부지런한 우리 공주님 생일에는 어디에 가고 싶지?”
생일은 하루였지만 생일을 즐기는 날은 일주일이 넘었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기쁘게 할까에 몰두했던 아버지에게 새삼 감사했다.
이벤트라는 단어조차 없던 60년대 말, 아버지는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둘째 공주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존대어로 이루어진 편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되어라.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아라. 삶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의 단골메뉴였다. 경쟁하거나 승부를 가르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즐거운 곳이고 누리는 곳이지 남을 밟고 일어서거나 일등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는 곳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세상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 그대로였다.
가슴이 벅차도록 흥분에 쌓인 채 매일 아침에 눈을 떴고, 세상은 늘 새로운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뛰어 놀아도, 책장을 신나게 넘겨도, 노래를 불러도 잠을 자도, ‘너는 사랑스러운 천사’라고 찬사를 들었다.
아버지. 그 사랑스러운 천사는 지금 쉰 살이 훨씬 넘었고, 그렇게 나이 먹었고,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네요. 그리고, 지금 많은 갈등과 고통에 휩싸여 사랑스러운 천사가 추락하고 있는 거 아시나요? 하지만 다시 일어설 겁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 어딘가 콕콕 쑤셔온다. 그것이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모르겠다.
시내의 작은 호텔에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한 여장을 풀었다.
단 하루 동안 겐그레아에서 고린도, 그리고 아테네에서 이스탄불까지 한 바퀴를 도니 마치 지구 한 바퀴라도 돈 것처럼 피곤했다. 도심에 위치한 호텔은 한국의 모텔 같은 분위기였다. 모든 것이 좁고 작았다. 그래서인지 참 아늑하다.
밤에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가끔 비도 흩뿌리는 사나운 날씨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바울을 쫓아다니느라 부르튼 발을 주욱 펴고 기지개를 켰다. 따뜻한 느낌이 나는 스탠드의 불을 밝히고 메모를 했다.
<내일, 여행의 마지막 날을 장식할 나의 생일을 뜻 깊게 보내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한국에 돌아갈 것이다. 맨몸으로 이곳에 왔지만 갈 때는 맨몸이 아니다.
바울의 오라마(비전)을 나는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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