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날은 비바람이 치는 멜랑콜리한 날씨였다. 우중충한 날씨에 애정이 깊은 나로서는 환성을 지르고 싶은 날씨였지만 순례자들은 곤혹스러워했다. 하긴 너무 춥기는 했다. 우산 들고 우비 입고 모두 만반의 옷차림이었는데 나는 우산도 우비도 챙기지 않았다. 비도 흠씬 맞고 싶었고, 바람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줄기는 가늘었지만 차가운 만큼 야무진 빗발이었다. 좋았다. 너무 비가 많이 온다 싶으면 패딩 점퍼의 후드를 뒤집어썼고, 은근슬쩍 내리는 찬비는 얼굴을 들이대면서 맞았다.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릴 경우를 대비해서 이른 아침부터 매표소 앞에서 기다렸다. 빗줄기가 좀 세어지자, 모두 따스한 상점으로 들어가 커피도 마시고 기념품을 둘러보았다. 밖이 쌀쌀하니까 상점 불빛이 더욱 포근해 보였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 많을수록 간직한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밖에서 추위에 떨다가 들어가는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을 처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들어가 마주하는 가족은 얼마나 다정한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담을 허물고 모든 세상의 벗들이 되라는 것이다.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도 어깨를 두드려주며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음만 한 번 확 뒤집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 마음을 뒤집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왕궁인 톱키프 궁전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모후를 위해 세웠다는 성 소피아 사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참 기이했다.
톱키프 궁전은 온통 보물로 가득했다. 보석이 돌처럼 흔한 전시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호화롭다. 보석에 취미가 없는 나이지만, 그래서 결혼반지조차 다이아몬드를 외면하고 내가 좋아하는 블루사파이어 알반지 하나로 땡 친 나였지만 눈으로 호사를 누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보석을 두르고 치장했던 왕궁의 술탄과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내면의 진실을 찾아보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들의 옷차림이나 장식품이나 궁전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궁전에서 살았을지에 더욱 관심이 갔다. 하지만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관광 엽서 그 어디에도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글귀는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의 호사를 나는 호사라고 느낄 수는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호사는 좀 달랐다.
하루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그다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단 냠냠거릴 책이 필요하고, 그 책은 나의 마음에 쏙 들어야하고, 그러므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침이 고여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귓등을 스쳐야 하고, 커피메이커에서는 원두커피가 가득 담겨 있어야 하고, 그리고 벌렁 누울 수 있는 푹신한 소파나 안락의자가 있으면 최고. 지금도 일주일에 닷새는 그 호사를 누리면서 살지만 그 호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삶의 베이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 베이스가 지금 위태롭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눈앞에 보이는 부귀영화의 상징물이 가득한 톱키프 궁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았다.
‘나는 저런 보석 따위는 필요 없으니 나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나 내려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나자마자 지직, 하면서 나의 뇌리를 때리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 왔다.
‘그래서, 너는 이제껏 호사를 못 누렸다는 말이더냐!’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으므로 즉시 하나님께 항복의 손을 번쩍 쳐들었다.
‘정정합니다. 조금만 더 마음 편하게 호사를 누릴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잘 다듬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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