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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성지순례

4. 수리아 안디옥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순례자들을 태운 버스는 수리아 안디옥을 향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높은 산을 휘감아 돌기도 하고 광활한 들판을 지나기도 했다. 땅은 넓었다. 어느 곳에나 사람들은 산다. 저들이 꿈꾸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국처럼 넓은 집을 장만하고 건강을 위해 산에 오르고 자식들이 일류대에 들어가고 남보다 더 나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그들도 살고 있는가.

TV에서 방영하는 세계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참으로 다양한 삶을 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천편일률적이다. 모두의 꿈은 한결같다. 신이 주는 인간의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는 일괄적인 사고를 가진 수천만 명의 한국 사람들을 생각하면 끔찍해진다. 스프링 벅처럼 모두 한 곳을 향하여 뛰어가는 모습은 나에게 시대와의 불화를 다시금 절감하게 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슬픔을 느낀다.

중간에 처음으로 식당에 들렀다. 터키 음식을 파는 휴게소 식당이었다. 식당은 제법 컸고 깨끗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종업원들은 와플 모양의 빵과 콩죽 같은 스프를 제일 먼저 내온다. 달지 않은 빵은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났고 스프는 구수했다. 향신료 냄새가 나지 않아 순례자들이 모두 잘 먹는다. 여행 끝날까지 질리도록 먹었던 야채샐러드도 풍성했다. 샐러드에는 꼭 누르스름하고 커다란 삶은 고추가 곁들여 있는데 신기한 맛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현지식을 좋아한다.

너무 많이 남긴 빵이 아까웠던 몇몇 순례자들이 가방에 꾸려 넣는 것을 보고 가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뷔페에 가서도 음식을 챙겨 와야 직성이 풀리는 좋지 않은 버릇은 외국에 나가서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손도 대지 않게 될 빵을!

 

하타이 지역의 인구 십만의 도시 안티키아. 성경에 나오는 바로 수리아 안디옥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비로소 주어졌던 곳. 나는 지금 이천 년 전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러 이곳에 왔구나. 문화 풍습 언어가 다른 아시아의 끝에서 이곳까지.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다.

베드로교회는 바위산 중턱 외진 곳에 굴을 파 만들었다. 동굴교회. 오로지 박해를 피하여 변변한 연장도 없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거대한 개미굴을 만들었다. 그들이 파내려간 것은 깊은 신앙심이었겠지.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같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 굴을 파고 교회를 지었다.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모든 것을 티끌처럼 버릴 수 있었던 그 믿음은 과연 그들의 행복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육신의 필요에 따라 사는 삶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신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의 그 어떤 것이 그들을 사로잡았을까.

세례문답에는 이런 것이 질문이 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 친절하게도 답이 적혀있고 그것을 외우라고 한다. 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나의 젊은 시절, 가장 암흑기였던, 스물 세 살의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혼돈에 빠졌다. 교리문답은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작은 프린트지에 답은 친절하게 적혀있었지만 그냥 문자적인 답일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 문답 앞에서 나는 세례받기를 주저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던 스물 세 살의 나는 그 문답을 이렇게 정정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인지.

하지만 저 동굴교회를 보면서 자유와 방종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고통당하는 나를 구원해 줄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내 몸과 영혼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다. 하나님,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시오.

 

기념사진을 찍으려 할 때 나의 구닥다리 디카의 배터리의 이상을 발견했다. 디카용 배터리가 아닌 일반 배터리를 가져온 것이었다. 가이드와 상의했더니 충전기를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 여행 준비물 품목에서 가장 소소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발목을 잡고 있구나. 살면서도 가장 소소한 어떤 것들이 때때로 발목을 잡을 때가 있지 않던가.

내 인생에서 발목을 잡힌 사건들도 많은 부분 아주 작은 일들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은 대개 한순간 미쳐버리는 어떤 충동에서부터 어긋났다. 갈림길에서 악착같이 좁고 험하고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짙은 길만 택했던 나의 삶의 여정은 늘 잘못 가져온 배터리처럼 순간순간 숨막히게 했다. 아무 소용이 없어진 디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터리는 가는 곳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 유명한 카파토기야까지 버스로 다섯 시간 이상 가야했다. 이번 여행은 나 홀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을 것 같다. 순례자들은 마치 지정석처럼 자신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좌석에 앉았다. 버스 뒤쪽에 있는 내 좌석을 <고요한 나의 자리>라고 이름 붙였다.

박학다식한 가이드의 말을 뒤로 하고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찾았다. 엠피쓰리에 있는 카테고리에는 여러 종류의 음악과 함께 설교문도 있다. 카테고리에는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 클래식, 경쾌한, , 무드, 조용한, 멜랑콜리... 새삼 그런 제목으로 지어놓은 나의 심리가 우스워졌다. 어떤 종류를 고를까하다가 멜랑콜리를 골랐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듣기에는 딱 좋은 곡들이다.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듣기에는 좀 껄끄러워할지도 모르는. 한동안 좋아했던 노래들이 줄줄이 나의 귓전을 울린다. 노래 한 곡 한 곡마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상황들이 터키 산비탈에, 인적 드문 황야에 오버 랩 되었다.

지난 일을 무 자르듯 끊어버리고 살 수는 없겠지. 결국, 나는 노래 몇 곡으로, 그 노래를 들으며 견디었던 고통의 시간들까지 더불어 가져오고 말았다.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지금 보이는 저 들판도, 낮은 지붕의 집들도, 동네마다 높이 솟아 있는 이슬람 사원의 높은 탑도. 고요한 나의 자리에 앉아 나는 고요히 그 시간을 누렸다.

 

피곤했던 순례자들이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집행부에서 준비한 사도행전 성경퀴즈로 웃음바다가 되는 버스 안. 맞힌 순례자는 1달러를 상금으로 받았는데 너무도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거의 장로 아니면 권사들로 이루어진 순례자들이니 성경퀴즈는 누가 먼저 손을 드느냐에 달려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저요 저요 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참 순진무구했다. 성경을 한두 번 읽었겠는가.

요즘에는 일 년에 한 번 통독하기도 힘들지만 나 역시 매일 한 시간 이상씩 성경을 끼고 살았다. 은혜가 넘쳤던 어느 해인가는 세 번을 통독한 시절도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힘들면 제일 먼저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다. 성경 필사를 하기도 한다. 어려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가장 정통적인 방법일 것이다. 신앙의 연륜도 깊고, 교회에서의 지위도 있으며 다들 그렇게 믿음에 있어서는 한 가닥 하는 분들이 모였는지라 거의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울까,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나의 질그릇 속에도 분명 예수가 살아 숨쉴 텐데 나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엠피쓰리 카테고리를 바꿨다. 미제레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미제레레는 지금의 나의, 또 다른 기도였다.

 

선물가게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기이한 나무를 보았다. 짙푸른 눈알 모양의 장식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였다. 또 다른 나무에는 붉은 색의 질그릇 항아리가 잔뜩 매달려 있다. 질항아리는 그렇다 쳐도 무슨 생각으로 사람의 눈동자를 나무에 달아맸을까.

나는 그 중 하나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니. 너무도 선명한 푸른빛의 눈동자는 나의 내면을 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터키 사람들의 풍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종교 의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눈동자 속에서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그리고 사랑한다. 어쩐지 눈물이 왈칵 솟았다. 누군가의 눈길을 이렇게 받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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