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토기야의 작고 아담한 호텔에 첫 여장을 풀었다.
거의 이틀 동안 몸을 누이지 못했다. 정말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새벽 4시에 이스탄불 공항에 내려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 터키 남쪽의 다나까지 이동했고 계속 버스로 이동하면서 유적지를 들리고, 그리고 다섯 시간의 긴 버스 여행 끝에 도달한 곳, 카파토기야.
“내일 아침 눈을 뜨면 호텔 뒤에 있는 괴뢰메 박물관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이드가 세 사람이나 되었으니 설명 듣기도 벅찼다.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마흔 살 정도의 진중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가이드, 이스탄불 공항에서 처음 만난 내 나이 또래의 선교사 가이드, 그리고 하산이라는 터키 현지인 가이드.
하산은 결혼한 지 이제 겨우 나흘이 지난 신혼의 남자였다. 터키에서도 신혼여행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하산은 가장 행복한 신혼의 며칠을 우리와 함께 터키 곳곳을 가이드 해야 하는 것이다. 터키에서는 관광할 때 반드시 현지 가이드를 동행시켜야만 여행 허가가 나온다고 한다. 한국말도 영어도 모르는 하산은 그야말로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그냥 일행들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나는 말이 없는 남자를 좋아한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숙소는 정말 훌륭했다.
이런 방에서 혼자 잠을 잘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룸메이트는 일흔 한 살이 되신 노 권사님. 권사님은 껄끄러운 내심을 숨기려고 애를 쓰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 같은 연배도 아니고, 게다가 좀 성깔이 있다고 소문난 작가와 같이 열흘 넘게 같이 지낼 생각을 하니 끔찍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권사님은 내숭은 떨지 않는 분이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음흉한 사람을 나는 혐오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신세대 유머도 잘하고 굉장히 트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 오 분만에 파악했다. 딸과 같이 성가대를 오래 한 경험으로 공통 화제를 찾을 수 있었지만 권사님은 지나친 수다는 피하는 눈치였다. 감사했다. 그것은 권사님의 배려였다. 나는 권사님이 단박에 좋아졌다.
무겁기 한이 없는 트렁크를 겨우 내려놓자마자 순례자들이 짐 정리하는 틈을 타 호텔 밖으로 뛰어나갔다. 호텔에 들어서면서부터 눈독을 들였던 알맞춤한 흡연 장소에 숨어들었다. 한 쪽 주머니에는 작은 가그린 병을 챙긴 것은 물론이었다.
괴뢰메 골짜기에 불어오는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담배 한 대. 묵직했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 이럴 때는 구교신자가 되고 싶다. 권사님. 저 담배 한 대 피울께요, 하고 정정당당하게 말하고 거리낌 없이 호텔방에 붙어 있는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을 텐데... 취미 생활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참아야겠지.
룸메이트 권사님은 센스만점이어서 넌지시 운을 떼면 이해해주실 만큼의 이해가 있으신 분으로 보이니 기회를 봐서 고백하고 좀 편하게 흡연을 즐겨야겠다.
호텔 식당에서 아메리칸 식 뷔페로 간략하게 식사를 마쳤다. 편한 옷차림으로 식당에 앉아 있는 순례자들은 한국에서부터 공수해 온 밑반찬을 늘어놓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로 나누어주고 받고 한다. 물론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쌉싸름한 커피를 그득하게 따라 두 잔이나 마셨다.
나를 열심히 챙기는 룸메이트 권사님을 왕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권사님이 아주 좋아하신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나는 나의 ‘즐거운 고독’을 손해 보더라도 그분의 여행의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하여 ‘즐거운 대화’로 맞춰드릴 의향이 있었다. 나는 포기가 아주 빠른 편이니까.
이리저리 쏠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트렁크 안을 보며 한숨만 쉬다가 다시 닫았다. 정리에는 젬병인 내가 제일 고민한 것이 바로 트렁크 정리였는데. 너무 피곤해서 노트북을 꺼낼 힘도 없었다. 그래도 밤에 두 번이나 밖으로 나가 담배 피우는 일은 도무지 귀찮지 않으니, 역시 흡연이 취미인 것은 확실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거의 이틀 동안의 피곤함을 말끔히 씻어 주니까.
생각 같아서는 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씻지도 않고 그냥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꾹 참고 샤워는 생략하고 간략하게 씻었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집을, 한국을, 나를 옥죄이던 사건사고 현장을 떠난 기쁨이 잔잔하게 얼굴에 퍼져 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떠난다는 것은 이 맛이야. 낯선 곳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 가족이 아닌 사람과 잠을 잔다는 것. 홀로 잠들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눈을 뜨면 집안의 풍경이 아니라 정갈하게 꾸며진 호텔 방이다.
이제껏 한 번도 나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가고 낯 선 사람을 만나고 지나치고 낯 선 음식을 먹는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도 좋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2011년 2월 16일 수요일
모닝콜이 울리기 전 눈을 떴다.
금빛 커튼 사이로 아침이 오고 있었다. 트윈 베드의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집은 아주 먼 곳에 있고 이곳은 낯선 땅이다.
정결한 시트를 목까지 당겨 덮었다. 시트에서 소리가 난다. 사각사각. 꿈에서 깨어났지만 꿈이 아닐까 싶어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지런한 룸메이트 왕언니가 욕실에서 나왔다. 불그레한 뺨이 열일곱 소녀 같으시다.
씻는 것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나였지만 샤워를 했다.
벌거벗은 몸으로 따뜻한 물줄기 세례를 받으니 지나간 모든 죄를 씻김 받는 기분이었다. 거품을 듬뿍 묻혀 나의 죄를 씻어냈다. 정성껏 화장을 하고 나니 새사람이 된 얼굴이 커다란 화장대 거울에 비춰진다. 그래, 나는 아름답다.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니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한창 식사 중이었다.
나는 원래 아침을 먹지 않지만 왕언니의 강력한 권유로 마지못해 따라갔다. 어른의 말은 일단 듣기로 했다. 간혹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정으로.
이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하얀 계란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쟁반에서 갓 삶아서 뜨거운 계란 한 개와 바게트 한 쪽과 치즈,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와 오렌지 한쪽으로 식사를 마치고 뜨겁고 진한 커피 한 잔 마셨다.
대개의 순례자들은 식성이 좋은지 나의 세 배 정도는 드시는 것 같았다. 아침인데 저렇게 많이 드셔도 괜찮을까. 그들의 왕성한 식욕을 보면서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간만에 아침 식사를 한 탓인지 배가 불러 헉헉거리는데 왕언니가 견과류, 과일, 꿀을 듬뿍 넣은 요플레를 갖다 주었다.
“저, 식사 끝났는데요?”
“고거 먹고 어떻게 온종일 끌려 다니려고? 몸에 좋은 거니까 어여 먹어.”
고거라니... 그만큼 먹었는데...
“넵.”
군소리하지 않고 지독하게 단 요플레를 꾸역꾸역 먹었다.
배불러 죽을 지경이었지만 다시 블랙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이 먹어 가슴만큼이나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식당을 나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뱃속이 놀라지 않았을까...
방으로 돌아와 어제 포기했던 트렁크를 다시 열었다. 한심했다. 엉켜있는 온갖 짐을 대강 다시 꾸렸다. 옷가지들은 더욱 작게 접고, 흩어지기 쉬운 작은 물건들은 비닐봉투에 구분해서 트렁크 안쪽 그물망에 잘 보이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옷을 골랐다.
나는, 오로지 내 자신만을 위해서 멋진 모습으로 여행하고 싶었다. 자기만족. 이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욕망을 이번 여행에서는 만끽할 결심이었다. 사람들에게도 멋진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랐다. 그러한 내가 우스운가, 하면서 몇 번 내 자신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평생 물질의 가난을 겪는 나이니만큼 이번 여행의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고, 평생 멋지다는 소리 거의 못 들어 보았으니 이번 여행의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마음껏 멋 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하기로 했다 나는 그러한 나의 본능을 사랑하기로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역량껏 코디했다. 회색 니트에 검은 패딩 점퍼, 스키니 청바지. 정성들여 롤빗으로 말린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다. 나는 나의 모습에 만족했다.
호텔에서 넓은 룸을 내주어서 정식으로 도착 예배를 드렸다. 회교권인데 여행객들에게는 편의를 봐주는 것이 감사했다.
버스에 오르면서 주변 경관을 보니, 세상에! 나는 지난 밤, 수많은 바위 탑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호텔에서 잠을 잔 것이었다. 바위마다 개미구멍 같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은 저 구멍들! 호텔 뒤에 병풍처럼 둘러싼 것이 바로 괴뢰메 박물관이었다.
이곳에 오기 몇 년 전, 진작 카파토기야를 여행한 문우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독식한 불교신자인 그녀였지만 종교를 떠난 경외감을 가득 담은 글이었다. 그녀의 글을 읽고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 카파토기야를 상상해보았는데, 내 눈으로 맞닥뜨린 카파토기야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냥 성경에서의 예수님 말씀처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와 보라.
박해를 피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수한 신앙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동굴을 팠다. 그 속에 예배 처소를 만들고, 숙소, 주방을 만들었다. 동굴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배와 기도뿐이었으리라.
사람의 삶이 예배와 기도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일생을 보내고 자손들을 낳아 그 자손들도 똑같은 삶을 동굴에서 살 수 있게 하면서도 그들은 행복했던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충만하게 했던가. 동굴에서 태어나 동굴에서 살고 동굴에서 죽으면서도!
선물가게에서 한국어판 카파토기야 관광책자를 샀다. 5불. 분명 바가지였을 테지만 다시 한 권 더 사서 나의 룸메이트 왕언니에게 선물했다. 나의 마음이 약해지거나 힘들어질 때 저 책자를 넘겨 볼 생각이었다.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산 저들의 충만한 삶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대로, 처한 형편 그대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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